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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을 점검하고 나아가라

신오덕 2015. 7. 7. 13:34

여행

26년 나이 차에도 논쟁이 가능하다니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했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

 

오마이뉴스|이돈삼|입력2015.07.03 21:24|수정2015.07.04 18:18

 

고봉서원의 빙월당. 서원의 주강당이다.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 이돈삼
광주유니버시아드가 시작됐다. 세계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가 열리고 있는 '빛고을' 광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지역과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경북 안동에 사는 퇴계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을 만날 수 있는 월봉서원으로 간다. 지난 2일이다.

고봉 기대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면서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0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30대에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철학사 정립에 기여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지만, 4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봉이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사칠논변'이라고도 한다. 당시 사단과 칠정은 유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너브실마을 전경. 임곡에서 황룡 방면의 도로에서 본 풍경이다.
ⓒ 이돈삼
고봉서원으로 가는 길. 돌담 기와에 능소화가 요염하게 피어 있다.
ⓒ 이돈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이다. 칠정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즉 기쁨과 화남,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이다.

사단과 칠정을 주제로 한 고봉과 퇴계 논쟁의 쟁점은 주기론과 주리론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을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이 모두 정이라는 주기설을 주장하며 퇴계의 주리론과 맞섰다.

퇴계의 주리론은 경험이나 현실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요시한 이론이었다.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상대적으로 주기론은 현실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도덕세계를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고봉도 주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고봉서원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백우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고봉서원 앞 풍경. 말끔하게 단장된 물길과 어우러져 있다.
ⓒ 이돈삼
논제도 논제지만, 퇴계와 고봉의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하던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살, 고봉은 32살이었다. 26년 차이였다. 퇴계가 1501년, 고봉은 1527년에 태어났다. 당시를 감안하면 할아버지와 손자뻘이 됐을 것이다. 직위 차이도 컸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 지금의 서울대학교 총장 격이었다.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선비였을 뿐이다.

퇴계의 인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받아주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을 텐데, 다 받아줬다. 지금 같으면 나이와 서열을 따졌을 텐데, 퇴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퇴계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잘 해야 본전'일 텐데도, 그렇게 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했다.

퇴계와 고봉은 나이와 직위를 떠난 벗이었다. 멘토와 멘티 관계였다. 이렇게 무려 13년 동안, 그것도 광주와 안동에 살면서 114통의 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은 사칠논변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마주한 건 평생 네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신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교류는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논쟁으로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에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고봉서원 빙월당 전경.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가진 고봉 기대승의 사람됨을 닮았다.
ⓒ 이돈삼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백우산의 숲길. 이 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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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은 고봉의 장남 기효증이 세웠다. 선조 10년, 1607년이었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렸다. 1941년에 고봉의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사당과 장판각 등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복원됐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월봉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망천문(望川門)으로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동쪽에 있는 기숙사, 서재는 서쪽의 기숙사다. 동재는 명성재(明誠齋), 서재는 존성재(存省齋)라 이름 붙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빙월당(氷月堂)이다.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기려 정조임금이 하사했다. 고봉의 올곧고 투명한 사람됨을 담은 이름이다. 이 빙월당이 고봉서원의 주강당이다. 당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광주시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숭덕사는 고봉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여기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장판각은 오늘날의 인쇄소와 비슷하다. 여기에는 고봉집(高峯集), 논사록(論思錄) 등의 목판 474개가 보존돼 있다.

고봉 기대승의 시조비.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숲길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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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의 묘. 백우산 자락에서도 앞이 탁 트여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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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은 백우산이 감싸고 있다. 산속 숲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숲길도 다소곳하다. 숲길을 따라가면 고봉의 시조비를 만난다. 고봉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앞이 탁 트여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두 기의 봉분 가운데 왼쪽이 고봉이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이 모셔져 있다.

서원 아래에 고봉학술원도 있다. 고봉의 사상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고봉의 13대손인 기세훈씨가 주축이 돼서 설립했다. 학술원 안에 별당 애일당(愛日堂)이 있다. 고봉의 6대손 기언복이 연로한 어머니를 위해 숙종 때 세운 집이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비.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윤상원 열사의 생가. 몇 해 전 화재로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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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서원에서 가까운 데에 윤상원 열사 생가도 있다. 윤상원 열사는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윤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맺은 박기순씨의 얼굴을 함께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박기순은 광주 광천동에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을 하다가 1978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1982년 2월 망월묘역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생가의 전시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를 만날 수 있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고찰 양림사와 한말 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정사도 가깝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임곡은 또 장성군 황룡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황룡으로 가면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이 있다.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백비도 있다. 편백숲이 아름다운 축령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대숲을 품은 너브실마을의 길. 애일당과 고봉학술원의 뒷편 풍경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월봉서원 찾아가는 길 월봉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호남고속국도 광산나들목에서 하남산단 9번도로를 타고 임곡 방면으로 간다. 연동삼거리에서 우회전, 임곡 소재지를 지나 장성 황룡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월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