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골키퍼 코치로서의 생활을 살핀다
신오덕
2018. 10. 2. 12:14
[엠스플 인터뷰] '신(神)의 손'이라 불린 사나이 "한국이 내겐 운명"
박찬웅 기자 입력 2018.10.02. 11:15 수정 2018.10.02. 11:43
-K리그 사상 깨지지 않는 기록 ‘8경기 연속 무실점’
-사리체프 맹활약에 ‘외국인 골키퍼 영입 및 출전 금지 조항’ 생겨
-‘신(神)의 손’이라 불린 사나이, 구리 신(申) 씨 시조 되다
-“이젠 외국인 귀화 선수 1호가 아닌, 한국인 ‘신의손’으로 불러주길”
[엠스플뉴스]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1’
2013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프로축구 출범 30주년을 기념해 'K리그 레전드 베스트11'을 선정해 발표했다. 당시 베스트 11에 뽑힌 골키퍼가 바로 신의손이었다.
현역 시절 ‘신(神)의 손’으로 불린 사나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K리그를 평정했던 이 골키퍼의 본명은 발레리 콘스탄티노비치 사리체프(58)다.
1991년 일화 천마 프로축구단에 입단하며 K리그와 인연을 맺은 사리체프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에 뽑혔다.
사리체프의 맹활약에 자극받은 다른 K리그 팀들이 외국인 골키퍼 영입에 앞다퉈 나서면서 토종 골키퍼들은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프로축구연맹이 ‘외국인 골키퍼 영입 및 출전 금지’ 조항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항이 신설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은 한국을 떠났다. 예외가 있다면 사리체프였다. 사리체프는 한국을 떠나는 대신 ‘귀화’를 택했다. 우여곡절 끝에 외국인 선수 최초로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데 성공한 사리체프는 한국명 ‘신의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후 신의손은 안양 LG 치타스에서 뛰며, 마흔이 넘은 나이에 2000, 2001년 ‘K리그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에 다시 뽑혔다.
신의손이 K리그 통산 320경기 동안 내준 실점은 357골. 무려 144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한 신의손은 ‘8경기 연속 무실점’이란 대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
한국 생활 28년 차인 신의손은 이제 자신을 ‘외국인 귀화 선수’가 아닌 ‘한국인’으로 봐주길 원한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K리그 역대 최고 골키퍼 신의손을 엠스플뉴스가 만났다.
한국 축구에 찾아온 소련 프로축구리그 '최고 골키퍼' 사리체프
한국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28년이 됐습니다.
1991년 ‘일화 천마 프로축구단’과 계약한 뒤 28년 동안 한국에 있었네요(웃음).
일화엔 어떻게 입단하게 된 겁니까.
'최오규'라는 분 덕분에 입단하게 됐어요. 그분은 한국과 소련을 오가는 회사원이었습니다.
회사원이요?
당시 일화 박종환 감독님과 최오규 씨가 아는 사이였어요. 박 감독님이 최 씨에게 "소련에 괜찮은 골키퍼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마침 최 씨의 러시아 회사 동료 가운데 축구 스카우트가 있었고요. 1991년 소련 1부리그 ‘FC 토르페도 모스크바’팀에서 뛰면서 최우수 골키퍼에 뽑힌 저를 그 스카우트가 최 씨에게 소개해줬고, 최 씨가 다시 박 감독님에게 소개하면서 일화 유니폼을 입게 됐습니다(웃음).
낯선 한국행, 불안하기도 했겠습니다.
그보단 새로운 경험이라 기대가 더 컸어요.
한국 무대에 적응하는 데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갑자기 한국에 왔기 때문에 모든 게 힘들었어요.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부터 한국 축구 훈련방식까지 모두 소련과 달랐습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필요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우선 전 골키퍼로서 경험이 많은 선수였습니다.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을 프로에서 골키퍼로 뛰었고, 소련에서 최우수 골키퍼로 뽑히기도 했어요. 네, 어느 나라에서 뛰든 자신감이 넘쳤어요.
두 번째 이유는 뭐였습니까.
팀에서 지원을 많이 해줬어요. 일화 분위기가 정말 좋았죠. 외국인 선수가 한국 축구나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팀과 동료들 모두 잘 알고 있던 것 같아요.
마지막 한 가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역시 가족이죠(웃음). 1984년 결혼해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왔어요. 팀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가족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마 혼자 한국에 왔다면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저에겐 모든 일이 어려웠기에, 하나라도 의지할 게 필요했어요. 제겐 그게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입단 후, 출전하는 경기마다 역사였고, 기록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한 경기를 뽑으라니 힘들군요. (잠시 생각하다가) K리그 데뷔해였던 1992년에 치른 시즌 첫 다섯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K리그 전체 팀이 6개 팀이었어요. 일화를 제외한 5개 팀과 치른 첫 경기가 제가 말씀 드린 '시즌 첫 다섯 경기'의 정체입니다(웃음). 낯선 나라, 낯선 무대에 적응할 때 만난 팀들이라, 지금도 그 팀들과 치른 경기의 스코어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웃음).
대단한데요.
K리그 데뷔전을 안양 LG 치타스(현 FC 서울)와 치렀어요. 0대 0으로 비겼습니다. 두 번째 경기 상대는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 축구단)였습니다. 1대 0으로 승리했죠. 그때 결승골을 기록한 사람이 지금 우리 팀 고정운 감독이었어요(웃음). 이후 2대 1로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를 이겼고, 포항 제철 아톰즈(현 포항 스틸러스)와는 1대 1로 비겼습니다. 마지막 경기 상대는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였는데 그땐 4대 0 대승을 거뒀어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경기입니다(웃음).
데뷔해 시즌 첫 5경기에서 2실점만 기록했습니다. 3경기에선 무실점 선방을 펼쳤고.
그래서 그 다섯 경기를 늘 기억하나 봐요(웃음). 상대 팀들과 첫 맞대결이라 바짝 긴장하고 경기에 나섰던 게 도움이 됐습니다.
사리체프의 맹활약 속에 내려진 ‘외국인 골키퍼 출전 및 영입 금지’ 조치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일화의 3년 연속 우승과 함께 1992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부문 4년 연속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당시 팀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현 FC 안양 고정운 감독, 전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신태용 감독, 현 MBC스포츠플러스 이상윤 해설위원 등 훌륭한 선수들이 팀 내 즐비했어요. 덕분에 3년 연속 우승할 수 있었고, 저도 개인 수상을 할 수 있었어요(웃음).
당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다른 팀에서도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갤 가로 저으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팀 분위기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팀 분위기를 바꾸는 차원에서 골키퍼를 외국인으로 영입하지 않았나 싶어요. 열 한 명의 선수 가운데 어떻게 골키퍼 한 명이 팀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대다수 언론에선 ‘일화가 사리체프 덕에 우승했다’는 기사를 냈어요. 하지만, 명확히 말씀드립니다만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습니다.
결국 외국인 골키퍼가 리그를 장악하자 프로축구연맹이 조치를 내렸습니다.
토종 골키퍼 기량이 저하된다는 이유로 외국인 골키퍼 출전과 영입을 금지했죠. 1997년을 시작으로 외국인 골키퍼 출전을 전체 경기 3분의 2로 제한했고, 1998년엔 전체 경기의 3분의 1, 1999년엔 아예 외국인 골키퍼가 뛸 수 없게 했어요.
다른 외국인 골키퍼들이 모두 한국을 떠났지만, 당신은 한국에 남았습니다.
전 처음부터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었어요.
그건 한국 축구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리체프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전 한국이 정말 좋았어요. 한국 적응이 모두 끝난 상태라, 굳이 다른 나라로 이적해 적응해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한국은 제겐 운명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라 경기를 뛰고 싶어도 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그게 문제였어요. 훈련은 계속했지만, 경기를 뛰지 못하니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스트레스가 상당했습니다. 일화와의 계약이 만료된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신의 손'이라 불린 사나이, 진짜 ‘신의손’이 되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지요?
안양 LG 치타스 조광래 감독님이었죠. 조 감독님이 제게 골키퍼 코치직을 제안했습니다. 다행히 계속 일할 기회를 얻었어요(웃음).
코치직을 받아들였다면, 은퇴 생각이 있던 겁니까.
그건 아니었어요. 플레잉 코치로 일을 시작했거든요. 1999시즌을 마치고 마무리 훈련 때 종종 골키퍼로 뛰었어요. 그걸 본 조 감독님이 "다시 골키퍼로 그라운드에 설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어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웃음). 한국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경기를 뜁니까. 그런데 일주일 후 조 감독님이 제게 다시 묻더군요. 그때 진심이란 걸 깨달았어요.
선수로 뛸 방법이 있었습니까.
조 감독님이 "한국인으로 귀화하자"고 하시더군요. 귀화하면 한국인으로 경기를 뛸 수 있다면서.
귀화 시험, 어땠습니까.
정말 어려웠어요. 아마 한국인도 귀화 시험 문제를 풀기 어려울 겁니다(웃음).
귀화 시험 준비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팀은 전지훈련에 갔지만, 전 한국에 남아 계속 공부했어요.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나 역사 등 한국에 대한 건 뭐든 공부했어요.
시험 볼 때 무척 긴장했겠습니다.
2000년 2월 23일이 시험일이었습니다. 시험장에 도착했는데 한국 귀화를 준비하는 외국인이 40명 정도 돼 보이더군요. 많은 사람을 보니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웃음). 시험지를 받은 후 첫 문제를 봤는데 ‘망했다’ 싶었어요.
망했다?
그만큼 어려웠어요(웃음). 긴장도 되고, 쫓기기도 했죠. 5분 정도 지났는데 오른쪽 대각선에 앉은 사람은 벌써 다 문제를 풀고 나가는 거예요. 전 아직 10문제밖에 풀지 못했는데(웃음). 감독관이 계속 제 앞을 서성여서 문제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필기시험 끝나고 10분 후, 감독관이 “필기 테스트에 합격했으니 ‘1대 1 대화 시험’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해 기분은 정말 좋았지만, 2차 시험이 남아 계속 긴장됐어요. 15분쯤 지나고 저를 포함한 3명이 시험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운이 정말 좋았어요(웃음).
운이요?
당시 방송사에서 제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을 한 달 동안 취재했어요. 시험일에도 어김없이 방송사가 절 찾아왔죠. 1대 1 시험을 보는데 갑자기 카메라 기자 두 명이 제게 다가오더군요. 저는 그러려니 했는데 오히려 시험관들이 더 당황한 겁니다(웃음). 당황한 시험관이 제게 쉬운 질문 2, 3개를 낸 뒤, 답을 듣고는 "가도 좋다"고 했어요. 방송사 덕분에 귀화 시험에 합격한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귀화 시험에 합격한 뒤 곧바로 K리그에 뛴 겁니까.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K리그에 선수 등록을 했어요. 그리고 한국인으로 경기에 나섰습니다.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져 있었을 듯싶습니다.
맞아요. 공부하느라 전지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시즌 시작을 앞두고 2, 3주 정도만 훈련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됐습니다.
그래서 2000년 거둔 업적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정말 뿌듯했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팀도 우승하고, ‘K리그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부문에 다시 이름을 올렸어요. 제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일 겁니다.
한국인 ‘신의손’, 그도 대한민국 기러기 아빠였다.
가족 가운데 혼자만 귀화한 것으로 압니다.
맞아요. 조사를 잘했군요(웃음). 가족 모두 소련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모두 국적이 달라요. 딸과 부인은 국적이 러시아고, 아들은 미국이에요. 전 당연히 한국이고.
가족과 한국에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까.
지금은 아내하고만 살아요. 딸은 캐나다에 있고, 아들은 미국에 있어요.
자식 걱정이 되겠습니다.
각자 자기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는 일이 국외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보내야죠.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잖아요(웃음).
한국엔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 본 적 있어요. 홀로 한국에 남아, 돈 벌면서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아빠를 말하는 거죠? 그러고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기러기 아빠의 삶을 살고 있네요. 한국인이 다 됐나 봅니다(웃음).
골키퍼 코치로서의 생활, 어떻습니까.
시즌 중엔 매일 훈련을 해요. 평소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하지만, 여름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합니다. 시즌 끝나고는 전지훈련을 가고.
쉬는 날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경기가 끝난 다음 날엔 쉽니다.
취미 생활이 있습니까.
음악을 듣습니다. LP판을 틀어놓고 집에서 쉬는 게 낙이에요.
LP가 꽤 많을 듯합니다.
700장 정도 됩니다(웃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까.
하나 콕 찍어서 말하기가 어려워요. 기분에 따라서 매일 좋아하는 음악이 바뀌거든요. 우울할 땐 우울한 음악을 듣고, 신날 땐 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그날의 감정을 맡기는 거죠.
그렇다면 최근엔 어떤 장르의 음악을 주로 듣습니까.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를 주로 듣습니다. 영국 대표 밴드인 제네시스, 핑크 플로이드 등 이 장르를 연주하는 가수도 좋지만, 그 뿌리는 비틀스라고 생각해요. 앨범에 담긴 수록곡 모두가 좋죠. 물론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웃음).
앞으로도 쭉 한국에서 살 계획입니까.
당연하죠. 제게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이제 저는 외국인 귀화 선수가 아닌 한국인이에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축구가 좋고 한국을 사랑하기에 28년이라는 세월을 한국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면 한국식 표현으로 ‘환갑’이더라고요(웃음). 언젠간 한국에서 보낸 세월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겠죠. 그렇게 저는 한국인으로 살아갈 겁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