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어느 시인이 발표한 시를 보고 학습한다

신오덕 2021. 3. 10. 14:20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삶을 위로했던 선비의 美..秋史가 심은 하얀 소나무

최동현 입력 2021. 03. 10. 14:06 댓글 0

 

 

 

<10> 살아있는 역사 自松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들녘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큰 나무는 비바람·눈보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무 대책이 없는 나무는 몸으로 버텨야 한다. 태풍·벼락이 몰아칠 때 맥없이 쓰러지는 건 하릴없다. 지난 가을 태풍 마이삭이 덮쳤을 때도 그랬다. 무려 9건의 천연기념물이 피해를 받았다. (아시아경제 2020년 9월4일자 참고)

 

하나같이 귀중한 나무들이지만, 그 가운데 특히 천연기념물 제253호였던 이천 신대리 백송은 유난히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어서 노거수로 자란 백송이 몇 그루 남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對)중국 외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인문학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백송 가운데 살아 있는 나무는 4그루뿐이다. 천연기념물이었다가 수명을 다했거나 태풍에 쓰러져 지정 해제한 백송은 무려 8그루나 된다.

 

태풍으로 쓰러진 이천 신대리 백송은 200여년 전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이 할아버지 민달용의 묘지 앞에 심은 나무다. 조선 후기 여흥(지금의 여주) 민씨 일가의 양반들이 권세를 누리며 중국과 맺은 역사에 대해 살펴볼 실마리가 되는 나무다. 그러나 이제 그 아름다운 백송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시인 조용미는 이 백송을 바라보며 "햇빛에 빛나는, 비늘을 드문드문 털어낸/흰 가지들"(시 "백송" 중에서)이라며 나무가 "껍질을 다 털어내면 하늘로 솟을까 두렵다"고 칭송했던 적이 있다.

 

덧붙여 이 뿌리가 "지구의 핵에 닿아"있다며 "밤이면 백송을 좌표 삼아 주위를 도는 별들이 있다"는 이천 신대리 백송 찬양가는 이제 시인의 노래에만 남았다.

 

소나무의 한 종류인 백송은 줄기 표면이 특별한 나무다. 하얀색을 바탕으로 밝은 회색의 얼룩 무늬가 아름다운 백송은 중국에서 들어온 나무다. 자람이 비교적 까탈스러워 중국 바깥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데다 옮겨심기도 잘 안 된다.

 

최근 들어 상서로운 빛깔의 백송을 키우려는 손길이 늘면서 우리나라 곳곳에 많이 심어 키우기는 한다. 그래봤자 아직은 어린 백송일 뿐, 크고 오래된 백송은 여전히 희귀한 편이다. 여전히 백송은 특별한 나무라 할 수 있다.

 

백송의 다른 이름들도 모두 하얀 줄기와 얼룩무늬에 기대어 지어졌다. 중국에서는 흰색 줄기의 특징에 기대어 백피송(白皮松)이라는 이름으로, 또 회색 무늬가 호랑이 가죽을 닮았다고 해서 호피송(虎皮松)이라고도 부른다.

 

줄기의 빛깔을 제외하면 백송은 여느 소나무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잎이 나는 방식이다. 두 개의 잎이 모여 나는 소나무와 달리 백송은 세 개의 잎이 한데 모여 돋아난다. 그 밖에 대부분의 생육 특징은 우리 소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추사 김정희가 연경에서 가져와 증조부 묘 앞에 심은 예산 용궁리 백송.

 

한 그루의 나무로 조국·고향
그리운 가족 향수 달랜 추사 김정희


고국 돌아와 심은 '예산 용궁리' 백송
인문학적 자취 남긴 대표적 백송

 

여전히 살아 있는 백송 가운데 인문학적 자취가 담긴 대표적 나무로 충남 예산의 추사(秋史) 고택 뒷동산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을 꼽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중국에서 가져와 손수 심은 나무다.

 

김정희는 예산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부근인 서울 통의동에서 보냈다.

 

당시 이곳에는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른 뒤 살던 집이 있었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결혼했다.

 

김한신은 영조로부터 월성위(月城尉)라는 직위를 얻어서 그들이 살던 집은 월성위궁으로 불렸다.

 

김한신은 후사조차 보지 못하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김한신의 조카인 김이주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김이주의 아들이 뒤에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이고, 김노경의 장남이 바로 김정희다.

 

월성위궁에는 김한신이 수굿이 모은 책을 간직한 매죽헌이라는 이름의 서고(書庫)가 있었다. 매죽헌은 장차 김정희의 학문 세계를 넓혀가는 바탕이 됐다.

 

아버지 김노경은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에게 김정희를 소개했다. 박제가는 어린 김정희를 제자로 삼았다.

 

김정희가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에 기울었던 것도 어린 시절부터 박제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월성위궁 앞에는 영조가 김한신 부부에게 선물로 내린 나무가 있었다. 바로 백송이다. 소년 김정희의 눈에 백송의 인상은 무척 강렬했을 것이다.

 

우리 산과 들에 지천인 소나무와 똑같지만 유난히 상서로운 흰빛을 띤 백송은 특별했다.

 

월성위궁의 백송은 긴 세월을 잘 살아 마침내 우리나라 백송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났다.

 

그러나 1990년 7월 태풍을 맞아 한순간에 쓰러졌다.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나무를 회생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쓰러진 나무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웠던 ‘서울 통의동 백송’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김정희는 스물을 갓 넘겨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아버지 김노경의 동지부사 자격으로 청나라 연경(지금의 베이징)까지 간 적이 있다. 1809년 10월28일 출발해 연경에 머무른 기간이 두 달 조금 넘었다.

 

여기서 김정희는 백송이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걸 봤다. 낯선 타국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나무와 만난다는 게 김정희에게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 그루의 나무로 그는 조국, 고향, 그리고 그리운 가족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마침내 1810년 2월 고국으로 돌아오는 청년 김정희의 손에 백송 한 그루가 쥐어 있었다.

 

그가 묘목을 가져왔는지, 씨앗을 가져왔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고이 싸들고 온 백송 한 그루를 김정희는 자기가 태어난 고택의 뒷동산, 그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지 앞에 심었다. 짬 날 때마다 돌아보며 애지중지 키운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예산 용궁리 백송이 바로 그 나무다.

 

2020년 태풍 마이삭으로 쓰러진 이천 신대리 백송의 살아있던 때의 자태

 

처음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
천연기념물급 비해 빈약해 보이지만


19세기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의
살아온 내력이 슬슬 풀려나오는 듯

 

청년 김정희의 나이 스물 다섯, 서기 1810년 전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백송은 올해로 210년을 갓 넘긴 셈이다. 나무가 서 있는 김흥경의 묘지는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조붓한 도로를 따라 약 600m 떨어진 곳에, 나무는 바로 그 묘지 앞에 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무는 생각보다 가냘프다.

 

추사 고택 관리자들이나 마을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보호로 건강 상태까지 나쁜 건 아니지만 규모는 여느 천연기념물급 나무에 비해 작은 편이다.

 

앙상하다고 이야기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이다.

 

원래 예산 용궁리 백송은 땅으로부터 50㎝쯤 위로 올라간 부분에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자랐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줄기와 서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줄기가 오래전 부러졌다. 지금은 처음의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 있어 빈약해 보인다.

 

가만히 나무를 바라보면 말없이 200년 넘게 살아온 나무 안에 담긴 19세기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가 살아온 내력이 술술이 풀려나오는 듯하다.

 

중국 밖에서 자라기 힘든 나무가 왜 이곳에서 자랐으며, 또 굳이 이 나무를 이 자리에 심고 애지중지 키운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건 나무 안에서 우리의 역사를 찾아보는 일이 된다.

 

이제 한창 때 아름답던 자태는 잃었지만 여전히 신비의 흰 껍질을 두르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