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아름다운 한옥을 보고 간다

신오덕 2021. 8. 23. 09:51

유리상자 위 날렵한 처마.. 21세기 하이브리드 한옥

채민기 기자 입력 2021. 08. 23. 03:01 수정 2021. 08. 23. 09:28 댓글 6

 

 

서울 창신동에 새로 연 문화공간 '여담재'

 

서울시 여성사 문화공간 '여담재'. 현대식 저층부에 한옥을 올린 사찰 건물을 리모델링해 디자인했다.

 

직선적인 느낌의 2층 유리 상자와 처마의 곡선이 대조를 이룬다. /사진가 신경섭

 

오늘날 한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형태와 재료, 기법까지 전통 방식을 따라야 비로소 한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형식을 취하되 그 안에 한옥의 정신을 구현하는 게 합리적인 접근일까.

 

서울 창신동 여담재는 이런 물음 앞에서 현대 한옥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대식 콘크리트 저층부 위에 전통 한옥이 올라 앉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희대 건축학과 천장환 교수가 설계했다.

 

지난주 이곳에서 만난 천 교수는 “기존 건물이 가진 잠재력을 극대화한 결과”라고 했다.

 

서울시에서 지난 5월 개관한 이곳은 여성사(史) 연구·교육과 관련 행사 등에 활용될 문화 공간이다.

 

방문객들은 도서실의 장서를 열람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평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개관(9월부터는 토요일도 개방 예정).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예약을 받는다.

 

원래 이 자리에는 사찰이 있었다. 도심 사찰은 산사(山寺)와는 모습이 다르다.

 

이곳에 있던 사찰도 현대식 저층부 위에 한옥을 올린 구조였다.

 

저층부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한옥이 대웅전이었다.

 

천 교수는 “건물의 단면도를 상상하니 먹고 자는 인간의 공간과 불상을 모신 신성한 공간이 한 집의 위아래로 단절된 모습이 그려졌다.

 

그 자체가 포스트모던이었다”면서 “어찌 보면 ‘아수라 백작’처럼 이상한 조합일 수 있지만 살짝 다듬으면 어디에도 없는 건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담재 옆‘거북바위’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한 도서실의 거북 책장. /사진가 신경섭

 

10여 년 전 사찰이 근처로 옮긴 뒤로 이곳은 방치됐다. 빈 절은 을씨년스럽게 변해갔다.

 

그래서 서울시에서 매입해 리모델링을 시작했을 때 주민들 사이에선 건물을 아예 헐고 새로 짓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천 교수는 “그렇게 하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건물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한옥과 현대 건축의 하이브리드(혼합식)라는 뼈대를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대웅전 외벽의 불교 벽화를 지워서 종교색을 없앴다.

 

천 교수는 한옥을 짓는 건축가는 아니다. 그는 “한옥 전문가가 아니어서 새로운 시도에도 거부감이 덜했던 것 같다”고 했다.

 

예컨대 기존 대웅전 벽을 철거하고 기둥 사이를 철제 구조물로 보강한 것은 한옥의 문법으로는 선뜻 내리기 어려웠을 결정이다.

 

이렇게 열린 공간이 된 대웅전 내부는 반듯한 상자 모양의 유리 구조물로 채웠다.

 

건물의 2층에 해당하는 유리 상자는 기둥으로부터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서 자리를 잡았다.

 

“꽉꽉 채우지 않고 여유를 두는 한옥의 공간감을 응용했습니다.

 

문화재가 아니라 오늘날 새로 짓는 한옥이라면 형태보다는 공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울시 여성 역사 문화 공간‘여담재’. 현대식 저층부에 한옥을 올린 사찰 건물을 리모델링해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반듯한 2층의 유리 상자와 처마의 경쾌한 곡선이 대조를 이룬다. 기와 지붕 뒤로 솟은 반투명 유리 건물은 여담재보다 높은 곳을 지나가는 뒤쪽 길을 이어 주는 계단이자, 주민들이 잠시 쉬고 회의 등도 열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가 신경섭

 

다만 처마의 곡선은 디자인의 중요한 열쇠였다. 천 교수는 “처마는 건물을 시원하게 해 주고 형태도 아름답다.

 

그런 곡선미는 흉내 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지붕의 처마와 (현대식 구조물의) 대비 효과를 기대했다”고 말했다.

 

땅이 품어온 역사적 맥락과의 연계도 촘촘하다.

 

여담재 바로 옆 거북바위는 단종비(妃)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서린 곳.

 

단종이 거북을 타고 승천하는 꿈에서 깨어난 왕후가 이곳에 오니 바위가 있더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 여성의 이야기가 얽힌 곳에 여성 문화공간을 지으면서 천 교수는 도서실에 거북의 등딱지를 연상시키는 책장을 직접 디자인했다.

 

거북바위 근처에 ‘지봉유설’을 남긴 이수광(1563~1628)이 머물던 비우당(庇雨當)도 복원돼 있다.

 

초가집과 여담재가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여담재는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한옥이면서도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자리에서 진행된 건축의 자연스러운 귀결(歸結)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