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평론가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사자성어에는 어린 사람을 향한 존중과 배려가 담겨 있다. 공자는 “젊은 후진을 두려워해야 한다. 앞으로 올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후학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어린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이라고 생각한다. 윗사람을 향한 강요된 존경만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꼭 필요한, 더욱 어른다운 마음가짐이다. 어린 사람을 훈계하려고만 하고, 나보다 뛰어날까 봐 미리부터 찍어 누르지도 말고, 그의 재능과 진심이 세상 속으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할 일 아닐까. 어린 사람들 속에서 놀라운 점, 배울 점, 아름다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른 되기의 즐거움이다.
어린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윗사람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의 압박감이 없을 뿐 아니라 ‘친구 같은 스승’을 만드는 최고의 방안이기도 하다. 중국의 철학자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 했다. 하지만 갑을관계의 대립이 날로 심각해지고, 윗사람을 향해 충언은커녕 사소한 불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회에서 이런 스승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스승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연장자와 소통하는 것’에서 어쩔 수 없는 권력관계를 발견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대신 나보다 어린 사람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갑을관계로 찌든 스승과 제자의 파워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출구를 발견했다.
나는 3년째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선생님으로부터 첼로를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딱 두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온갖 걱정의 실타래로부터 잠시나마 놓여날 수 있다. 나는 연주에는 젬병이지만 ‘첼로를 배우는 행위’로부터는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면서 선생님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고, ‘선생님이 직접 연주해 주시면 이 곡이 훨씬 잘 이해될 것 같다’는 감언이설로 첼리스트의 아름다운 연주를 집에서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나는 첼로 선생님이 취직 걱정, 결혼 걱정, 가족 걱정으로 잠 못 이룰 때 그녀의 고민을 함께 나누며 친구처럼 수다를 떨기도 했고, 내가 그토록 꿈꿨던 ‘음악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선생님이 부러워 ‘그쪽 세계’의 온갖 비화들을 물어보며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취미 하나 없는 건조한 인생’이 싫어 시작했지만, 지금은 첼로를 배우는 시간이야말로 인생의 눈부신 오아시스다. 무엇보다도 첼로 선생님은 기상천외한 칭찬 제조기의 재능을 보여주신다. 내 연주가 저번 주나 이번 주나 큰 차이가 없을 때도 ‘이제 훨씬 활을 편안하게 쓰시네요’ ‘음정이 훨씬 정확해지셨어요’ ‘이제 이 곡을 완전히 이해하신 것 같아요’라는 식의 칭찬을 늘어놓으신다. 스승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를 받기보다는 질책과 비난을 훨씬 많이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칭찬을 듣는 제자’의 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스승이 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나 또한 이 배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나의 첼로 선생님이 얼마 전 손가락을 다쳤다. 첼로 선생님의 남편과 시댁 어른들이 ‘네 연주를 듣고 싶다’고 여러 번 청을 넣으니 선생님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여버린 것이다. 첼로 선생님이 남편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첼로 소리를 나에게는 그토록 아낌없이 들려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 귀여운 수줍음과 강렬한 자의식이 더욱 아프게 마음을 울렸다. 내 작은 거실에 울려 퍼지는 선생님의 첼로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 선생님께 고백하고 싶어진다. 수없이 첼로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보다 어린 선생님이 나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을 알기에, 그로 인해 첼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승은 항상 두려운 존재, 날 아프게 하는 존재였지만 당신으로 인해 처음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스승’을 발견했다고.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