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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령탑의 손과 국정최고지도자의 발을 묶어놓은 것을 점검하라

신오덕 2015. 6. 11. 10:24
[장경덕 칼럼] 우리 시대의 차르
기사입력 2015.06.10 17:21:29 | 최종수정 2015.06.10 17: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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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czar)를 임명한다`는 건 모순적인 말이다. 차르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존재다. 신만이 그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 그런데도 미국 언론은 대통령이 무슨무슨 차르를 임명했다는 표현을 흔히 쓴다. 적어도 어느 한 문제에 관한 한 그에게 막강한 결정권을 주었다는 뜻이다. 차르는 언론의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의 권위를 일깨우는 데는 효과적인 비유다.

정부는 지난 3주 동안 메르스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러자 우리에게는 왜 `메르스 차르`가 없느냐는 힐난이 쏟아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작년 `에볼라 차르`를 임명한 것과 대비됐다. 물론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끄는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와 국민안전처 장관이 총괄하는 메르스대책지원본부가 꾸려지고 민관 합동 즉각대응팀과 종합대응 태스크포스도 가동됐다. 청와대에는 두 명의 수석이 긴급대책반을 지휘했다. 그런데도 메르스 차르는 보이지 않았다.

차르가 없는 대책회의는 `봉숭아학당`처럼 비치기 십상이다. 연금 전문가인 복지부 장관, 군 장성 출신인 안전처 장관을 메르스 차르로 여기는 이는 없었다. 산더미 같은 경제 현안을 제쳐두고 메르스 일일점검회의에 매달리는 경제부총리, 한·미 동맹을 다지는 정상회의까지 미룬 대통령이 메르스 전문가일 리는 더더욱 없다. 차르의 부재는 그러지 않아도 눈코 뜰 새 없는 경제사령탑의 손과 국정 최고지도자의 발을 묶었다. 국정 전반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이나 경제 현안을 총괄해야 할 부총리가 메르스 차르가 될 수는 없다.

차르는 바로 이런 때 필요한 존재다. 그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서는 대통령의 분신이 될 것이다. 차르를 임명할 때는 오로지 그 일을 누가 가장 잘할 수 있느냐만 따져야 한다. 관료조직의 윗자리에 있거나 특정 분야 전문지식을 갖췄다고 그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오바마 정부의 에볼라 차르는 엘 고어와 조 바이든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부처 간 조율의 달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에는 숱한 차르들이 있었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차르라는 별명이 붙은 직책만 110여 개에 이른다. 이 자리를 거쳐간 이는 150명 가까이 된다. `에이즈 차르`도 있고 `국토안보(대테러) 차르`도 있었다. 그중에는 상원 인준을 거쳐야 하는 자리도 꽤 있다. 규제의 차르로 불리는 백악관 정보규제국(OIRA) 수장이 대표적이다.

오바마 정부 첫 규제 차르였던 캐스 선스타인은 공화당의 견제로 낙점을 받은 지 열 달이 지나서야 인준을 받았다. 정보규제국은 그만큼 막강한 자리다. 연방정부 규제 법령에 관한 한 그가 고개를 저으면 어떤 것도 실행될 수 없으므로 힘센 부처 각료들도 그 앞에서는 큰소리칠 수 없었다. 규제에 관한 한 그는 차르였고 대통령의 분신이었다.

우리 정부도 곳곳에 그런 차르들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이런저런 민관위원회나 허울만 그럴듯한 온갖 특보는 차르의 일을 할 수 없다. 메르스 사태는 전통적인 거대 관료조직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세월호 침몰 후 정부는 국민 안전을 위해 많은 것을 뜯어고쳤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의 위험이 닥치자 여전히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강력한 권위를 가진 차르들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기존의 권력구조와 경직된 시스템으로 대응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메르스 사태 이후 전염병 방역 체계는 한층 치밀해질 것이다. 하지만 예컨대 국제 테러 같은 새로운 위험이 닥칠 땐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또다시 책임 없는 전문가와 전문성 없는 당국자가 전면에 나서 아마추어리즘의 끝을 보여줄 것인가.

메르스 사태는 국가 지배구조와 정부의 일하는 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한다. 병원 정보 공개를 늦춘 것은 그 취지가 무엇이었든 간에 예정된 실패였다. 정부가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지금처럼 열려 있고 복잡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에서 경직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권력은 금세 신뢰를 잃는다. 해법은 있다. 가장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이에게 가장 큰 권한을 주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 리더십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경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