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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스크랩] 여주 명성황후 생가와 기념관 본문
대한제국을 포함한 조선의 27대 모든 왕과 왕후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행복했다기 보다 나름대로 아픈 삶의 흔적과 상처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처럼 기구한 분들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의 치밀한 살해계획으로 총도 아닌 일본도로 난자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을미사변의 정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 책임자들의 후손들은 일본에서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몇년 전 김진명 작가가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일본인이 작성한 '에조보고서'의 발견으로 다시금 당시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아직 그 보고서의 진위에 대해서는 논쟁이 분분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살해 진상이 밝혀지는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뛰어난 외교적 안목에 기초한 자주성, 개혁과 개방에 대한 혁신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개혁황후였던 명성황후를 잊지 않는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명성황후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있는곳이 바로 여주의 생가와 기념관일것입니다.
생가 유적지 입구
여주 IC에서 나오자마자 시내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바로 오른쪽으로 생가유적지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유적지 주차장이 나옵니다.
어른 500원, 학생 2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먼저 명성황후 기념 조각공원이 보입니다. 이 곳에 굳이 조작공원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지만 전국 청년작가들이 참가하여 555점이 응모한것중 가장 명성황후의 정신을 잘 표현한 52점을 뽑아 설치했다고 하니 이왕 만들어진거 잘 관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각공원 內 연못
먼저 기념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왜곡된 당시 역사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목적으로 건립된 기념관은 대한제국 당시의 각종 자료와 명성황후의 친필,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등을 잘 보관,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명성황후 장례식을 재현해놓은 모형물은 고증에 입각하여 만들어서 참 유익한 전시물인것 같습니다.
기념관 앞 추모비. 뒤에 보이는 건물은 공연장(문예관) 입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었던 곳입니다.
원래는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1630~1687)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그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습니다.
안채입니다. 명성황후의 영정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바라보는것 같습니다.
왕후가 아닌 한 여인의 삶으로써도 애잔함이 베어 나옵니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써 시아버지인 대원군(大院君)과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처하기도 했던 명성황후. 그녀에게는 시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은 남편인 고종(高宗)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아버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종이 아내와 여성으로서 명성황후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정치적 동지로 대했습니다.
더욱기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종이였고 나이도 많고 미색도 뛰어나지 않았던 엄씨를 품어 명성황후에게 씻을수없는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모든 선각자와 개혁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녀도 외로웠을것입니다. "홀로 있을수 있는 능력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라는 에히릭 프롬의 말처럼 어쩌면 고종보다 더 당당하게 일본에 맞서고자 했던 그녀는 너무나 조선을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방 위치에 건립된 탄강구리비 와 비각.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란 뜻입니다.
문화유산 해설사님이 설명을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민유증의 신도비. 신도비 아래 거북의 머리가 특이합니다.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이는 묘소쪽을 가르키고 있다고 합니다.
민유증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본관은 여흥으로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 입니다. 송시열의 문하로써 1650년에 과거에 급제한후 숙종 7년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영동녕부사가 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입니다.
명성황후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조선에서 영원히 제거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노력은 결국 일본자객들의 칼에 의해서 아침 이슬같이 사라져 갔습니다. 지혜로운 명성황후의 외교적 노력은 일본 정치인들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명성황후는 '생각'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비록 그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삶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졌을 지라도
말입니다.
이곳을 나오면서 왠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불행했던 그녀의 삶과 최후 때문만은 아니였습니다. 아직도 황후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를 오늘날도 온전히 계승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말하기를 "우리는 생각을 해도 우리가 해야 하고 힘을 내도 우리가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함석헌의 지적처럼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것은 가난에 있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가난하다는 데 있다"라는 말을 깊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건님의 블러그中 에서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
나중에라도 왜 놀이공원이 아니라 이런곳을 찾아 다녀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명성황후의 생가(生家). 이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았던 한 국모(國母)의 마음의 자세와 국가에 대한 책임감(責任感)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자신의 탐욕스러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것 같다면 학생의 교육권마저도 볼모로 이용하겠다는 사학들과 그 앞에 서서 장외투쟁을 벌이는 '모르쇠' 정치인들, 대통령의 고유한 인사권 마저도 자신들의 계파의 이해득실의 기준으로만 바라봐 정부의 정치력에 상처를 내고도 아무렇치도 않다는듯 행동하는 '무뇌아' 정치인들과 비교해 보면 스스로의 위치에서 안밖에 적대자들과 맞서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명성황후는 얼마나 생각하는 지도자였습니까?
경복궁에 복원중인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픈 현장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았던 명성황후의 모습을 많은 분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2006 . 1 . 7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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