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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의 고향은 무위

신오덕 2006. 7. 20. 19:09

 

[이덕일 사랑] 高仙芝의 고향, 武威

 

 


한(漢)나라 곽거병(?去病)의
 
흉노 격파를 기념하는 감숙성
 
(甘肅省) 무위(武威)시의 당
 
(唐)나라 때 지명은 ‘사막의 서
 
늘한 도시’라는 뜻의 양주(凉州)였다.
 
 
 
무위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티베트 군사를 격파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
 
芝)의 고향이기도 하다.
 
 
 
무위에서 만난 중국 역사학자는 이런 사실을 전
 
혀 모르고 있다가, “그 부친 고사계(高舍?)는 처
 
음 하서군에 종군했다”라는 ‘구당서(舊唐書)’ 고
 
선지열전(列傳)을 보여주자 비로소 수긍했다.
 
 
 
하서군은 양주에 있던 부대였던 것이다.
 
고선지 부자는 어떻게 하서주랑(河西走廊)의 통
 
로인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삼국사기’ 문무왕 조는 서기 668년 당나라 이세

 

적(李世勣)이 고구려의 보장왕, 복남(福男)·덕남

 

(德男) 등 왕자들과 대신 등 20여만 명을 당으로

 

끌고 갔다고 전하고 있다.

 

 

 

만주 서쪽의 영주(營州·현재의 요령성 조양[朝

 

陽])와 산둥반도의 내주(萊州·현재의 산둥성 액

 

현[掖縣]) 등이 이주 지역이었다.

 

 

그러나 ‘구당서’고종본기(高宗本紀) 669년 5월

 

조에 따르면 이 유민들 중 2만8200호(戶)는 수

 

레 1080대, 소 3300두, 말 2900필 등과 함께 재

 

이주당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재이주 숫

 

자를 3만8200호라고 전하면서, “고구려 백성 중

 

다수가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고구려 부흥운동

 

이 강제이주의 배경임을 알려주고 있다.

 

 

부흥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당나라는 고

 

구려 유민들을 강제로 분산시켰던 것이다.

 

 

 

강제 분산 지역은 현재의 안휘·강소·섬서·하남·

 

호북성 등 중국 내지와 사막을 뜻하는 ‘장안 서

 

쪽 여러 주[京西諸州]의 광활한 지역’이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장수부(將帥部) 조는 “고구

 

려의 포로를 사막 서쪽으로 배치했다”라고 전하

 

는데, 이 사막 서쪽 도시인 무위로 강제이주당한

 

유민 중에 고선지의 선조가 있었던 것이다.

 

 

 

무위는 최근 발견되어 화제를 일으킨 사라진 로

 

마군단의 유적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다.

 

2000여년 전의 로마군단의 흔적도 찾아내는 상

 

황에서 1400여년 전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을 찾

 

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