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철과 신념

성진시와 김책시 본문

부자

성진시와 김책시

신오덕 2006. 10. 14. 17:47

 

 

 

 

[이덕일 사랑] 성진시와 김책시

 


조선 선조 때의 정여립
 
(鄭汝立) 옥사(獄事) 관
 
련 기록인 ‘기축록(己丑
 
錄)’에는 평소 조헌(趙憲)을 싫어하던
 
선조가 “이 사람은 장차 반드시 마천
 
령(摩天嶺)을 다시 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헌이 마천령을 넘어 영동역(嶺東驛)
 
으로 유배 갔던 것을 빗댄 말이다.
 
 
영동역 아래가 항구도시 성진(城津)이
 
다.

 

 

 

서애 유성룡의 ‘북변(北邊)에 대한 헌

 

책의(獻策議)’에는 성진에 ‘바닷가 모

 

래섬’이란 뜻의 해정(海汀)이란 곡물

 

창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해정창(海汀倉)은 임진왜란 때 가

 

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격전지였

 

다.

 

 

 

성진은 함경도 변두리였지만 숙종 45

 

년(1719) 4월 문학(文學) 유복명(柳

 

復明)이 “앞에는 마천령의 험고(險固)

 

가 있으며, 단천과 길주 사이에 끼어

 

있어 이로부터 남도와 북도로 나누어

 

지니, 진실로 제1의 요해처(要害處)입

 

니다”라고 상서(上書)한 것처럼 교통

 

의 요지였다.

 

 

 

일제의 ‘중추원 조사자료’의 기록대로

 

인천·진남포·군산·목포·마산과 함께

 

외국인들의 치외법권이 인정되던 각

 

국 거류지(各國居留地)였던 것도 교통

 

의 요지임을 말해준다.

 

 

 

성진은 또한 탈출기의 작가 최서해(崔

 

曙海)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의 보신여학교(普信女學校)를 다

 

닌 최정희(崔貞熙)는 “이 학교는 교실

 

에서 바다가 내다보이고 또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적(汽笛)이 뚜~우 하고 들

 

리는 좋은 학교였다.

 

 

 

나는 가끔 아카시아 그늘이 푸른 사이

 

로, 바다가 푸르고 그 바다 속의 하늘

 

이 더 푸른 것을 내다보았다(‘삼천리’

 

1941년 4월호)”라고 회고했다.

 

 

 

작가 이석훈(李石薰)은 “오후 세 시를

 

지났을 무렵인데, 성진은 벌써 황혼이

 

짙은 것처럼 어슬어슬한 것 같다.

 

 

 

과연 위도(緯度)가 높은 북국(北國)임

 

을 알겠다(‘삼천리’ 1941년 3월호)”

 

라고 회상했다.

 

 

쌍포천·갈파천 등의 작은 하천과 세천

 

온천이 있는 항구도시 성진시가 엊그

 

제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되

 

는 김책시이다.

 

 

 

6·25전쟁 때 전사한 전선사령관 김책

 

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백성들의 자유를 빼앗고 굶기는 것으

 

로도 부족해 산하(山河)의 속살까지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있으니 선조

 

들 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입력 : 2006.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