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철과 신념

팔만대장경 제작 동기를 보면 부자가 된다 본문

부자

팔만대장경 제작 동기를 보면 부자가 된다

신오덕 2006. 10. 29. 13:47

 

 

[이덕일 사랑] 팔만대장경 제작 동기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
 
장경의 조조(雕造) 동기
 
에 대해 “불력(佛力)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
 
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 동경대학의 지내굉(池內宏) 교
 
수가 ‘고려의 대장경’(1924년)에서 “몽고의 침입
 
에 허덕이면서 국방능력이 없던 고려 군신(君臣)
 
들의 종교상의 미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본
 
것과 궤를 같이 한다는 문제가 있다.
 
 

 

고(故)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고려대장경 신탐

 

(新探)’에서 다른 견해를 펼쳤다.

 

무신정권의 최이(崔怡)와 그 처남 정안(鄭晏)이 불

 

교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국가사업이었다는 것이

 

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무신

 

정권의 큰 고민은 불교계의 반발이었다.

 

‘고려사’최충헌(崔忠獻) 열전은 흥왕사(興王寺) 경

 

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 등의 승려들이 최충

 

헌을 살해하려다 실패해 되레 800여 명이 살해되

 

었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여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집단저항이 가능한 유일한 조직인 불교계의 회유

 

에 고심하던 무신정권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한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고종 19년(1232

 

년) 몽골 병사들에 의해 전소(全燒)되자 대장경 재

 

조(再雕)로 불교계 회유에 나섰다는 것이다.

 

 

 

고종 23년(1236년)부터 고종 38년(1251년)까지

 

완성된 재조(再雕)대장경의 조조를 관장한 인물이

 

최이의 처남 정안이란 사실은 지내굉의 ‘미신 운

 

운’하는 해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말해준

 

다.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승려로 출가시

 

킨 최이의 불심(佛心)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은 ‘태조실록’7년

 

(1398년) 5월조에 태조 이성계가 군사 2000명을

 

동원해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고 전한다.

 

 

 

또 이듬해인 ‘정종실록’ 1년 1월조에는 “불경을

 

인쇄하는 승도(僧徒)에게 해인사에서 공궤(供饋)

 

하게 하였다”고 전해, 태조 7년 지천사를 거쳐 해

 

인사로 이안(移安)했음을 알게 한다.

 

 

‘합천 팔만대장경 축제’가 10월 27일부터 법보종

 

찰(法寶宗刹) 해인사를 비롯해 합천군 가야면 일

 

대에서 열린다.

 

 

 

국난(國難)에 피었던 문화의 의미를 되살릴 때이

 

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