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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팔만대장경 제작 동기를 보면 부자가 된다 본문
[이덕일 사랑] 팔만대장경 제작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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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고려대장경 신탐
(新探)’에서 다른 견해를 펼쳤다.
무신정권의 최이(崔怡)와 그 처남 정안(鄭晏)이 불
교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국가사업이었다는 것이
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遷都)한 무신
정권의 큰 고민은 불교계의 반발이었다.
‘고려사’최충헌(崔忠獻) 열전은 흥왕사(興王寺) 경
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 등의 승려들이 최충
헌을 살해하려다 실패해 되레 800여 명이 살해되
었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여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집단저항이 가능한 유일한 조직인 불교계의 회유
에 고심하던 무신정권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한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고종 19년(1232
년) 몽골 병사들에 의해 전소(全燒)되자 대장경 재
조(再雕)로 불교계 회유에 나섰다는 것이다.
고종 23년(1236년)부터 고종 38년(1251년)까지
완성된 재조(再雕)대장경의 조조를 관장한 인물이
최이의 처남 정안이란 사실은 지내굉의 ‘미신 운
운’하는 해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말해준
다.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승려로 출가시
킨 최이의 불심(佛心)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은 ‘태조실록’7년
(1398년) 5월조에 태조 이성계가 군사 2000명을
동원해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고 전한다.
또 이듬해인 ‘정종실록’ 1년 1월조에는 “불경을
인쇄하는 승도(僧徒)에게 해인사에서 공궤(供饋)
하게 하였다”고 전해, 태조 7년 지천사를 거쳐 해
인사로 이안(移安)했음을 알게 한다.
‘합천 팔만대장경 축제’가 10월 27일부터 법보종
찰(法寶宗刹) 해인사를 비롯해 합천군 가야면 일
대에서 열린다.
국난(國難)에 피었던 문화의 의미를 되살릴 때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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