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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덕 2006. 11. 25. 16:42

 

 

[이덕일 사랑] 名文章

 


조선처럼 문장가(文章家)를 높
 
였던 나라도 찾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양관’(兩館: 예문관
 
과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최고로 쳤다.
 
 
대제학을 ‘글의 저울’이란 뜻에서 ‘문형(文衡)’, 또
 
는 대학자란 뜻에서 ‘대학(大學)’이라 부른 것은
 
문장뿐만 아니라 학문도 제일이어야 하기 때문이
 
었다.

 

 


대제학은 임금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고, 반드시

 

일세(一世) 제일의 학자를 가려야 했다.

 

“정승 셋이 대제학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나온

 

이유이다.

 

이는 정치력이나 처세술로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연안 이씨의 이정귀(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일

 

상(李一相), 광산 김씨의 김만기(金萬基) 김진규

 

(金鎭圭) 김양택(金陽澤)의 ‘3대(代) 대제학’을 높

 

이 쳤던 것은 이 때문이다.

 

 

미문(美文)보다 한 차원 높은 글이 명문(名文)이

 

다.

 

미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명문은 뜻을 추구

 

하기 때문이다.

 

송(宋)의 구양수(歐陽脩)가 ‘매성유시집서(梅聖兪

 

詩集序)’에서 “명시는 대개 궁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해진 뒤에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라고

 

한 것은 무언가 갈구하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을 보기 어렵다

 

는 데 있다.

 

조선중기의 문장가 임제(林悌·1549~1587)가 그

 

런 인물이다.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그러

 

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어찌 죽음이 애석하겠

 

느냐”는 유언처럼 배짱이 맞지 않는 나라에서 그

 

는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시에 “자장(子長)은 먼

 

유람에 명문장가가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자장은 사마천(司馬遷)을 뜻한다.

 

사마천이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나는 일찍이 서쪽으로는 공동(空桐)에 이르고 북

 

쪽으로는 탁록(?鹿)까지 갔으며, 동쪽으로는 바다

 

[발해]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과 회수

 

(淮水)를 건넜다”라고 적은 것처럼 수많은 답사로

 

명문장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명문장이 반드시 책상 위에서만 얻어지

 

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논술에 매달려야 하는 수험생들에게 들려주

 

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11.19 22:4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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