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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과 상상력으로 나아가라

신오덕 2013. 1. 31. 13:18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 출간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시인 황동규(75)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은 지나간 시간이 더 많을 때 당도하게 되는 어떤 문 앞에서 쓴 시다. 그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얼마간 여유가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지나온 긴 시간과 다가오는 짧은 시간을 그 문의 그늘에서 더듬게 된다.

그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고 아무도 말해주지 못한다. 문을 통과하고 난 이후 그 안쪽에 무엇이 남을지도 알 수 없다.

"조만간 나도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겠지./…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매에 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하는 풀밭처럼/ 아니면 모르는 새 말라버린 춘란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얼마 동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무중력 냄새로 떠돌게 될까?/"(시 '무중력을 향하여' 중)

시인은 곳곳에 죽음의 문을 세우고 늙어가는 몸을 자각한다. 시력은 나빠지고 축대에서 떨어져 당기는 등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 먼저 건 전화지만 통화 중에 상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은 사방에서 감지되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다를 것이 없다. 몸에 발목 잡히지 않고 생각이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이 젊은 시절의 값 없는 축복이라면 삐걱이는 몸속에 생각이 숨을 죽이는 경험 역시 새로운 일이다. 노년 역시 스스로를 타이르고 견디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시인은 늙음에 가린 그 시절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가만가만 일러준다.

"세월에 제대로 몸을 담궈 썩지 않고 삭는 곳에/ 아름다움과 기품이 담긴다지만/ 제대로 삭혀만 진다면/ 그런 후식(後食)은 없어도 좋으리./…슬픔도 기쁨도 어처구니없음도/ 생각 속에 구겨 넣었던 노기(怒氣)도/ 그냥 느낌들이 되어 마음의 가장자리 쪽으로 녹아 흐른다."(시 '돌담길' 중)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시 '사는 기쁨' 중)

1987년 미국 뉴욕대 객원교수로 브로드웨이를 걸었던 시인은 2009년 다시 그 길에 섰다. 마음속엔 힘겹게 옛 추억이 출몰한다. 이것이 필시 '삶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그냥 걷기'일거라 생각하면서 시인은 "내가 없는 미래가 갑자기 그리워지려 한다"고 고백한다.(시 '브로드웨이 걷기' 중)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시인은 시집을 열며 짧게 적었다.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

문학과지성사. 157쪽.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