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와
'카네기'정신
제가 자주 인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제로썸께임(Zero-Sum
Game)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말의 의미는 '경제 일방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반드시 상대방에 있어서 그만큼의 손해를 수반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제 자신의 풍요와 치부 이면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누군가의 희생과 빈곤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복지란 단지 '제 것을 남에게 베푼다'라는 동정의 의미라기보다 제로썸께임의 맥락에서 보면 '원래의 주인에게 받은 것을 돌려준다'는
당위의 의미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기본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기업가들은 자본주의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소유에만 집착할 뿐, 자본주의의 또 다른 한 축인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즉 사회복지에는
관심을 제대로 두지 않는 듯 하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인 앤드류 카네기의 다음 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에
의하면 "부자의 인생을 두 시기로 나뉘어야 한다.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부를 분배하는 시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처럼 분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다시 말해 사회복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부의 획득은 결국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자본주의라는 명분을 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사회 전반에 있어 기업이란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만이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며 사는 사람들은 있다. 필자가 자원봉사원으로
일하던 야학의 선생님들은 적어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일부가 아닌가한다. 야학의 경우 학생 대부분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수업료란 당연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재정의 빈약함은 물론 교육환경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야학 선생님들은 월급은 커녕 오히려 제 사비를 털어가며 학생을 교육시키는 실정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생님들
또한 형편이 딱히 학생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대학재학생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이 사회의 어른으로써 늘 무엇인가를 빚진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항상 "제 자신이 이렇게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많은 분들의 희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에게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건전한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기업가정신이란 꼭 돈 많은 기업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야학의 선생님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에 동참하는 이들이야말로 성금 몇 푼으로 생색내기에 급급한 기업가들보다 더 책임성이
강하고 충실한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타인에 진정한 봉사는 둘을 가졌을 때 하나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을 때 그 하나마저
나누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따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카네기 또한 하나가 있을 때 그 하나를 마저
나누어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네기가 둘을 가졌을 때 하나를 나누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카네기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자식에게 세습하지 않고 복지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한 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현재의 한국사회가 IMF 구제금융를 겪고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카네기 정신이 오히려 필요한 게
아닐까 한다. 그저 돈은 모으면 모을수록 좋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정당하게 쓰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라는 참다운 기업가 정신 말이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이 또한 카네기의 말이다. 분명 자본주의사회에 있어
살아가는 동안 부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일을 했다는 칭찬일 것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부자라는 말은 분명 기업가로서는 듣지
말아야 할 칭찬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때 부자였다는 말속에는 결국 사회에서 받은 것에 대한 빚을 갚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망을 꿈꾸던 2000년대의 첫발에 서서 새천년을 설계하며 이 말을 한번쯤 되새겨 보는 것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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