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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굴곡

신오덕 2005. 7. 21. 11:23

 

 

 

출장을 다녀오던 길에 언양의 태화강 중류에 잠시 차를 세웠다.

강은 여전했다. 가을 햇살이 물위에서 소리를 내며 깔락이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이리 저리 발이 닿는 대로 걸어 본다. 짙은 색의 돌이 보이면 발끝으로 툭 차서 엎어 보기도 하고
또 얕은 물 속에서 독특한 문양의 돌이 보이면 발을 걷고 손을 넣어 들어내기도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노라니 돌 밭에 내려앉은 양광과 물에 비치는 강렬한 빛으로 눈이 어찔하다. 큰 돌 위에 걸터앉아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내어 물었다. 강물에선 작은 돌이 뜨거럭 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말라 버린 수초사이로는 서걱이는 바람소리가 났다.

꿀럭꿀럭 하며 물굽이가 생기고 손가락 만한 고기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도 보인다. 그 위로 옅은 새털구름이 기분 좋게 깔려 있는 푸른 하늘에서 가을의 태양이 세상을 빛내고 있다. 이런 계절에는 내 삶도 함께 청명의 풍요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일 게다.

두어 시간쯤을 그리 헤매고 또 쉬고 강과 바람과 돌을 즐기었다. 물론 그 수많은 돌들만큼 많은 인생사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 머리를 들고 허리를 폈다. 그 순간 눈에 딱 뜨이는 것이 있다.
들고 간 헤켈로 툭툭 쳐서 돌을 집어냈다.

정말 맘에 든다. 밀도가 있어 보이는 색이며 무엇보다 그 심한 굴곡의 형이 눈에 쏙 든다.
급한 마음이지만 천천히 돌을 들어내고 흙을 털어 내어 물에 씻어 보았다. 보통이 아니다. 불균형이 또 다른 균형을 만들어 내어 보인다. 앉음새의 안정이 상부의 불안정을 균형감 있게 받쳐준다.

'수수준투'란 말이 있다. 중국의 북송시대의 문인 미원장[米元章]이 갈파한 수석감상의 네 가지 기준이다. 즉 명석이란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하고 또 돌 표면에 주름이 멋지게 뻗어 있으며 격조 높은 기품을 간직할 것이고 그리고 연약하면서도 강한 선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수석에도 많이 적용되는 점으로 감상의 기본을 말함이다.

아쉽게도 투, 즉 뚫림은 없으나 나머지 세 가지엔 그런 대로 만족이다. 동시에 그 밀도 높은 중후감이나 깊은 맛의 색깔까지이니 이 정도면 감상애완의 가치가 충분한 셈이다.

그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려 이 돌과의 인연을 만들어 주신 창조주께 감사를 드렸다. 나에게 허락 해주신 이 석복[石福]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그 돌을 집으로 데리고 와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올려 두었다. 이제 물을 뿌리고 말리고 그리하여 세월과 애완의 흔적을 남기는 양석을 시작한다. 그러기를 한 이삼년 꾸준히 해내면 돌 내부에 있던 본연의 색이 세월의 은은함으로 돋보여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훌륭한 심성도 저와 같아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잘 기르면 그와 같은 은은한 품성이 결국은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애정을 가지고 잘 가르친다는 '양육'이란 것 아니겠는가.

여하간 이 돌은 울룩불룩한 주름이 그 제일의 맛이다. 단단한 청록의 석질에 한껏 멋들어진 파임이 있다.

얼마나 들여다보았을까?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왜 저 굴곡에 가치를 둔단 말인가. 단단한 것일 수록 그렇게 패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 희소의 가치를 귀중하게 쳐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추상적인 선의 난무에 어떤 예술적인 가치가 곁들여져 있단 말인가.

원래 수석은 그 형과 질과 색을 삼요소로 친다. 이것의 순위는 없다, 아울러 우열도 없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 나름대로 가장 선호하는 식별의 기준은 있다. 내 경우에는 돌의 질이다. 색이나 형보다 돌이 주는 그 밀도와 질감에 점수를 더 얹어준다.

그러나 밀도와 질감이라면 그야말로 차돌 같은 것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차돌은 그저 둥글둥글 원만하며 곱게 자라온 듯한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부모 덕으로 잘 양육된 사람 같은 것이다.

다시금 돌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저 물끄러미 사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밀도가 높되 굴곡이 있어 주면 가치가 더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단단한 돌은 그렇게 쉽게 굴곡의 주름이 잡히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쉽게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소성은 있다.

이것의 가치는 쓰라린 경험이다. 굴절된 경험의 인생을 대변한다. 그러나 어쩌다 다른 돌에 부딪히거나 그냥 굴러서 깨어져 버린 그런 우연만은 아니다. 그 상처로부터 수많은 세월의 부대낌 속에 부딪히고 깨어지고 그리고 세파에 쉬임없이 마모되어 그야말로 강골의 뼈를 남긴 삶의 정수이다.

그것이야말로 숱한 경험과 반성 속에서 얻어진 원만함을 보여주며 그 경지가 우리에게 완숙함의 교훈을 내어 준다. 모든 찌꺼기나 군더더기를 다 들어 낸 완전을 지향하는 삶과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도 마냥 부모 품에서 곱게 자란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귀한 가치로 추구될 수가 없다. 예기치 않았던 어려운 역경을 딛고 새로이 도전하며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이며 그리하여 오해와 절망과 증오를 다 들어내고 그것에 의한 중후한 경험만이 남아 그를 보며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그 경지가 전해지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가치이며 높게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굴곡진 인생, 그러나 그 실수와 아픔을 통해 얻어진 경험을 제대로 승화시켜 보이는 영광된 상처의 소유야말로 진정한 삶의 소유가 아니겠는가.

돌이 말없이 그 인고의 완성을 보여주듯 진정한 삶 역시 역경의 세월을 뛰어 넘어서
말없는 가운데 그 완성을 웅변한다.

 

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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