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철과 신념

시민아파트 본문

성공

시민아파트

신오덕 2005. 11. 30. 16:21

 

[만물상] 시민아파트


김기천 논설위원 kckim@chosun.com

 
입력 : 2005.11.29 02:21 52'

1970년 4월 어느 새
 
벽, 서울 마포구 창전
 
동의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서 있던 시민
 
아파트 한 동(棟)이
 
소(牛)가 눕듯(臥) 무
 
너졌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와 준공식을 치른 지 넉
 
달도 안 돼 폭삭 주저앉았다.
 
이 사고로 33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다.
 
전체 30가구 가운데 절반만 입주한 상태여서
 
그나마 인명피해가 적었다.
 
 

▶시민아파트 1호인 서대문 금화아파트를 비

 

롯해 19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가 하나같이

 

산등성이 아니면 산허리에 올라선 데엔 사연

 

이 있다.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도 불편하지

 

않으냐”고 서울시 공무원들이 이의를 달자

 

김현옥 시장이 호통쳤다고 한다.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시민아파트는 와우아파트 사고로 부실공사

 

의 대명사로 추락할 때까지 근대화를 상징

 

하는 기념물 행세를 했다.

 

 

▶시민아파트는 서울시가 ‘해방촌’을 비롯해

 

도심에 난립한 무허가 판자촌을 정리하는 재

 

개발사업을 벌이면서 철거민을 위해 지었다.

 

1969년부터 3년간 2000개동, 9만가구를 짓겠

 

다는 계획이었고, 첫해에만 406개동 1만5840

 

가구를 건설했다.

 

 

당시 서울시청 현관에는 긴 시정 구호가 내걸

 

렸다.

 

 

‘선택+준비+실천+집념+증거….

 

시민 위한 아파트 2000동, 450만 우리의 용기

 

이다.

 

훈장이다.

 

의욕수(意慾數)를 과시하자.’

 

 

▶‘불도저’로 불리던 김현옥 시장이 와우아파

 

트 사고로 갈렸고, 시민아파트 사업도 434개

 

동 1만7365가구를 짓고는 끝났다.

 

대부분 정상 건축비의 반도 들이지 않은 날림

 

이었다.

 

처음엔 웬만하면 보강 공사를 거쳐 유지해보

 

려 했다가 1971년부터는 안전진단에서 이상이

 

드러나면 아예 없애기로 하고 1970년대에만

 

100여 개동을 철거했다.

 

시민아파트는 도심의 흉물, 애물단지가 됐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중구 회현동 제2시민아

 

파트가 내년에 헐린다는 소식이다.

 

시민아파트가 여지껏 남아 있었다니 신기하다

 

는 생각부터 든다.

 

와우아파트 사고 직후 지은 것이어서 벽에 못

 

이 박히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은 덕분이

 

라니 참 역설적인 생존비결이다.

 

게다가 최초의 중앙난방 아파트여서 연예인,

 

공무원들이 다투어 들어와 살았을 만큼 인기

 

가 좋았다고 한다.

 

회현 시민아파트는 아직도 골조는 튼튼하지만

 

이를 떠받치는 옹벽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계고가도로에 이어 개발시대의 음울한 상징

 

물 또 하나가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