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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점검하라

신오덕 2014. 6. 28. 16:02

 

[오늘과 내일/박중현]그 남자의 표정

기사입력 2014-06-26 03:00:00 기사수정 2014-06-26 03:00:00

 

박중현 경제부장

 

내 기억 속 최고의 표정 연기는 단언컨대 1967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순박하고 어리숙한 루마니아 농부 요한은 아름다운 아내 수잔나를 탐하는 동네 경찰서장의 계략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모함을 받고 노동캠프로 끌려간다. 유대인, 헝가리인 등으로 오인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끌려 다니던 그는 엉뚱하게 인종주의자 히틀러가 칭송한 순수 혈통 ‘아리안’의 외모를 가장 완벽히 갖춘 인물로 뽑혀 독일군 홍보 포스터 등에 모델이 되는 희극적 상황에 놓인다.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전과(前過) 때문에 전범재판에 회부된 그에게 변호사가 묻는다. “당신은 여기에 왜 와 있는지 아십니까.” 다음과 같은 어리바리한 대답이 요한을 구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8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했어요.”

“활짝 웃어 달라”고 주문하는 고향 역의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전쟁 통에 낳은 소련군의 아이를 안은 아내와 재회하는 요한. 명배우 앤서니 퀸은 펑펑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헷갈려 어정쩡한, 그래서 진정 비극적인 요한의 표정을 완벽히 연기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소설을 토대로 앙리 베르뇌유 감독이 만든 영화였다.

이달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새 국무총리 후보자를 깜짝 공개한 날 기자들 앞에 선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의 표정은 고위공직 지명을 받은 여느 후보자들보다 훨씬 밝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낙점 받고 기분 나쁜 사람 있겠냐만 “표정 관리 좀 해야겠다” “너무 웃는다”는 농담이 나왔다. T(Time·때) P(Place·장소) O(Occasion·상황)에 맞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일찌감치 체득한 정치인, 관료들과 달리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살아온 기자였던 탓일 게다.

다음 날 ‘악마의 편집’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교회 강의 내용이 공개되면서부터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유가 넘치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친일파’란 야권의 비판에 욱하는 감정도 보였다.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를 제일 존경하는 내가 어떻게 친일파일 수 있나”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며 낯색을 붉히기도 했다. 이어 여권 내에서조차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의 표정에서 억눌린 분노가 배어나왔다.

이런 와중에 그의 사퇴를 유도하려는 정부가 나서서 문 후보자의 조부가 건국훈장까지 받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해주는 희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같은 건국훈장을 받은 할아버지를 둔 필자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청와대의 처분을 오래 기다리던 그는 24일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사퇴 의사를 밝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성공한 언론인이자 주위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살아온 개인이 인생의 절정에 섰다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15일간의 파노라마 같은 표정 변화를 국민은 생중계를 통해 지켜봐야 했다.
 
청와대는 이미 문 후보자의 후임을 찾기 위해 많은 명망가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있다. 후보감을 찾기 얼마나 힘든지 이런 신종 보이스피싱이 유행한다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국무총리직에 관심 있으십니까. 관심 있으신 분은 본인 확인을 위해 삐 소리가 난 뒤 개인정보를 입력해 주십시오.”

다음번에 누가 총리 지명을 수락하건 다시는 이런 인사 참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청와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증해야 한다. 며칠 건너 한 번씩 참사, 참극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천국과 나락을 오가는 개인의 표정을 낱낱이 지켜보는 건 국민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 시대의 희비극이 함축된 남자의 표정은 영화에서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