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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한 말에 앙금을 남기지 말아라

신오덕 2014. 8. 8. 12:58

 

[매경춘추] 알고 보니
기사입력 2014.08.06 17:16:08 | 최종수정 2014.08.07 13: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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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감독 좋아해?”안면은 있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는 서먹하다. 대화의 물꼬를 어떻게 틀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우연히 내 가방에서 삐져나와 있는 팸플릿을 본 모양이다. 팸플릿은 한 영화감독의 특별전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는 그 감독이 만든 그간의 영화에 대해서 두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우린 비슷한 구석이 많은 것 같다." 헤어질 때 우리는 지인에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비슷한 경우가 한 차례 더 있었다. "알고 보니 시인이시라면서요? 쾌활하신 거 보고 생각도 못했는데." 한 술자리에서 지인 중 하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네, 맞습니다." 대답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아는 시인의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요. 옷 입는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까지." "알고 보면 시인도 제각기 달라요." 두 시간 넘게 한 테이블에 있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맥을 못 잡고 내내 겉돌았다.

이처럼 어떤 정보는 둘 사이를 가깝게 해주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각자의 취향과 정체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많은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숨기곤 한다.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을 때 분위기가 경직되는 걸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못 마셔요, 기독교인이에요, 페미니스트예요, 병역면제자예요… 하지 못한 말들은 앙금이 되어 그 사람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자신의 일부만 드러낸 채 견디는 시간이 편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인터뷰 때문에 한 기자분이 내가 사는 동네로 오신 적이 있었다. 먼 길 오신 분께 뭐라도 좀 대접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고기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고깃집으로 걸어가는 길, 기자분이 쭈뼛쭈뼛하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세요? 고기 안 좋아하세요?" "예… 저… 채식주의자입니다." "그럼 산나물밥 먹으러 가요!"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격의 없이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는 내게 알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었다.

알고 보기 전까지는 최대한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도 다른 누군가에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