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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고희동 가옥을 보고 유산을 남겨라 본문
화가의 유산 따뜻한 박물관
서울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누구 가옥’이라는 공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 ‘누구누구’는 세상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집을 후대가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창덕궁 북쪽 끝 근처에 있는 고희동 가옥과 서촌 옥인동 인왕산 끝자락의 박노수 미술관,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 등이 그런 곳이다.
우리나라 첫 번째 서양화가
고희동 가옥
한옥에 살어리랏다,를 꿈꾸며 사는 사람에게 고희동 가옥은 몽유도원 같은 곳이다. 창덕궁 정문 돈화문 서쪽 돌담길을 걸어 끝까지 걸어가면 마음을 빼앗을 만한 작은 스튜디오와 가게, 커피숍들이 뜨문뜨문 보행자의 눈길을 잡아챈다. 그 길 끝에는 창덕궁 외삼문(폐쇄)이 있고, 그 문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 첫 번째 집이 고희동 가옥이다. 열린 철대문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잔디가 있고 정면으로는 우람한 고목이 찾은 이를 반긴다. 마당에 서서 집을 바라보노라면 그 묵직한 중후함과 날렵한 추녀의 모습에 저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현관은 정면이 아닌, 집을 바라보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오는데, 고희동 화백이 살아생전에도 그렇게 이용했는지 모르겠으나 집안에 현관을 향한 동선이 따로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고희동 가옥 현관에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가면 고희동 자료실, 서화실, 안방, 부엌, 화실, 사랑방으로 구성된 ‘ㄷ’자 형태의 한옥 내부가 나온다. 자료실에는 고희동의 작품 일부와 그의 생애를 정리한 문구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자화상들이 먼저 눈에 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1915년 30세 때 캔버스에 그린 유채화인데 ‘당시 앞서가던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위축됨 없이 당당한 민족적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다. 이 작품은 고희동이 동경예술대학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것으로 현재 진본은 동경예술대학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 고영철의 직업은 역관으로 중국에서 영어를 배운 개화기 지식인이었다. 그는 아들 고희동을 한성법어학교(역관 양성 교육기관)에 보내 프랑스어를 배우도록 했는데, 학교에서 만난 프랑스 도예가 ‘르미옹(Leopold Remion)’을 통해 서양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졸업하기 전에 이미 광학국이라는 관청의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일본의 침략과 간섭이 심해지고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자 직을 관 두고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로 유학, 서양 유화를 배웠다. 유학 생활을 끝낼 때 그린 자화상 세 점의 유화는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부채를 든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 작품으로 기록, 등록문화재 제487호로 등재되었다.
귀국 후 자화상과 함께 <가야금을 타는 미인> 등을 발표한 고희동은 휘문, 보성, 중동학교 등에서 도화圖畵(미술)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호남 서양화 창시자인 오지호, 당시 정물화와 풍경화로 유명했던 도상봉, 간송미술관을 만든 전형필, 문인 이상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오세창, 이도영, 노수현, 안종원, 이한복, 이상범 등 화단의 동료들과의 교류를 통해 미술 운동을 펼쳤고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를 창립, ‘협전’이라는 정기 전시회를 개최했고 미술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수 민간 단체인 서화협회와 협전은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미술대전’에 밀려 15회 전시회를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후 고희동은 화가로는 물론 미술운동가로서 대한미술협회와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등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정계에도 발을 들여놓아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을 거쳐 참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목적은 우리나라 문화 예술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고희동 가옥은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에 손수 설계도를 그려 건축한 개량 한옥으로 전통 한옥과 일본식 인테리어 디자인이 적절히 조화되어 품위와 편의성을 지닌 집이다. 그는 이 집에서 41년을 살며 작품 활동을 하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류했다. 고희동 가옥 현관에서 오른쪽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그의 화실과 사랑방이 있다. 그곳에는 당시 고희동이 사용했던 화구들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찾는 이들의 감성을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철거 위기에서 시민이 살린 고희동 가옥
1965년 고희동이 세상을 뜬 뒤로 그의 집은 수많은 풍파를 만났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허물어진 것을 뜯어 고치기를 수차례 한 끝에 여기저기 변질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2002년, 대형 가구 회사에서 이 일대 가옥들을 매입, 연구소로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을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의 반대 운동으로 2004년 등록문화재 등재에 성공했고 2008년 종로구에서 매입, 2011년 복원 및 보수 공사를 마치고 시민에게 개방했다.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 4>
2011년 복원 공사 후 처음 개방되었을 때 열린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전이 네 번째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11월 28일부터 내년 2월 15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인쇄시대의 도래 또 하나의 도전’으로 일제시대 때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신문 발간, 잡지 창간 등 인쇄 시대를 맞아 고희동, 이상범, 노수현, 이도영 등 화가들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한성순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과, 청춘 등 잡지에 그린 삽화를 볼 수 있다. 단촐한 규모의 전시지만 우리나라 미디어 그래픽의 원조를 접할 때는 묘한 흥분이 일기도 한다.
고희동 연보
1886년 서울 출생
1899년 한성법어학교 입학
1909년 예식관으로 재직 중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로 관비 유학
1915년 귀국
1918년 서화협회 출범
1918년 원서동 16번지에 집을 짓고 이사
1921년 <서화협회보>발간
1927년 서화협회전에 한국화 출품, 이후 한국화에 전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의 종신 회원 겸 초대 회장
1965년 80세로 타계
찾아가는 길
위치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38
대중교통 지하철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지하철 1, 5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에서 창덕궁 돈화문 서쪽 돌담길 – 660m – 고희동 가옥
승용차 돈화문 서쪽 원서공원(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206-4) 앞 공영 주차장에
주차 후 도보
문의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http://nt-heritage.org 02-2148-4165
간결한 작풍 간결한 유산
박노수 미술관
2013년에 세상을 뜬 박노수 화백은 2011년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세상에 돌려주겠다는 뜻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종로구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설립을 위한 기증 협약’을 통해 자신의 뜻과 세상의 동의를 되돌리지 못하게 장치한 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것이 오늘 옥인동 인왕산 끝자락에 멋들어진 모습으로 앉아있는 박노수 미술관의 모습이다. 그는 어쩌면 이 집을 구입할 때 ‘미술관’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미술관 관람 내내 하게 된다. 박노수 미술관은 경복궁역에서 서촌산책길을 걸어 통인시장 앞에서 옥인동 언덕길로 올라가다 만날 수 있다. 큰 길에서 조금 들어가 있는 미술관은 일제시대 때 지은 양옥집 그 모습 그대로다. 벽돌로 마감한 일층과 회벽에 목재 창살로 마감한 2층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마당 곳곳에 앉아있는 석물들과 그 위로 솟아 있는 감나무와 희끗희끗한 잔설들이 오늘의 계절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축물은 일제시대 때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에게 선물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당시에는 집 뒷 뜰에 추사 김정희가 당시 문인들과 모여 풍류를 즐겼던 곳인 ‘송석원’을 음각으로 새긴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의 한옥과 중국식, 서양식 건축 양식이 혼재된 건물은 반지하, 1층, 2층으로 구성되어있는데, 1층에는 온돌방, 마루, 복도, 응접실이, 2층에는 역시 방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박노수 화백이 이 집을 구입한 것은 1972년으로 알려졌다. 2층을 증축했다는 것 말고는 최초 건축 시기인 1930년대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미술관은 개관 초기 무료 입장 제도를 종료, 이제는 2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미술관 실내는 물론 정원도 입장권을 구입해야 출입할 수 있다. 실내로 들어서자 작품 감상보다 먼저 오래된 목조 실내의 맨질맨질하고 반짝반짝한 마루와 기둥,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80년을 향해 가는 주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목향도 은은하다.
박노수 미술관은 서울시 1종 등록미술관으로 박 화백이 기증한 작품과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 모두 1000여 점의 소장품이 보관, 전시되어 있는 예술품의 보물창고다. 모두 6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는 작품과 그가 아껴 사용했던 가구들, 수집품들이, 2층에는 역시 대표작품들과 그가 살아생전 사용했던 화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화풍은 간결하고 강렬해 보였다. 쓱쓱 선을 그려내고 초록, 노랑, 파랑 색깔을 입힌 그의 작품에서 수묵담채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전시실 실내에서의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박노수 화백과 그의 가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박노수 화백이 생전에 쓴 칼럼들과 그의 작품 일부가 프린트된 단행본 <화필인생>과 최근 개관 1주년 기념 전시 도록을 구입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시 - 화가의 집
박노수 미술관을 지금 찾아야 할 목적이기도 하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내년 8월 1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박노수 화백기 기증한 작품들과 수집품, 미술관 건축과 정원, 수석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폐관은 6시) 입장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 박노수미술관 02-2148-4171
박노수 연보
1927년 충남 연기 출생
1952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62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1953년부터 국전 출품, 대통령상 등 다수 수상
2013년 87세로 타계
찾아가는 길
위치 서울시 종로구 옥인1길 34
대중교통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우리은행 왼쪽 골목 자하문로7길 – 옥인길 – 200m
승용차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로 900m 운행, 신교동교차로에서 좌회전, 오른쪽에 있는 푸르메재활센터(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89) 지하 공영 주차장을 이용한다. 이곳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10~15분 거리다. 미술관 인근에는 주차할 곳이 없다.
문의 02-2148-4171
테라쿠타 작가
권진규 아틀리에
우리나라의 조각 예술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권진규 작가다. 그의 작품 주인공들의 눈은 삶의 방향을 찾는 구도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때로는 너무도 형형하게 살아있어 보는 이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신여대 근처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는 1959년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위해 스스로 만든 집이자 작업실이었다. 1949년 조각을 배우기 위해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한 그는 프랑스 조각가 브르델의 제자로 로댕의 뒤를 이은 작가였던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교수를 사사, 서양 조각의 지평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적용했다. 9평 작업실은 천장이 유난히 높다. 대형 작품 제작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또한 우물과 가마를 설치, 흙은 개고 굽는 작업을 이곳에서 했다.
그렇다. 권진규는 흙(점토)을 빚어 조각을 한 테라쿠타 기법의 작가였다. 그는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는데, 그동안 그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던 한국 미술계에서 그의 진가를 사후에 알아주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2006년 그의 여동생 권경숙 씨가 오빠의 아틀리에를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 복원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고, 그것을 계기로 권진규의 작품 세계가 대중의 정서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다행한 일이다.
현재 입주 프로그램과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12월부터 3월까지는 매월 넷째주 금요일 오후 3시 또는 4시에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신청자가 6명 미만일 경우 개방되지 않는다.
찾아가는 길
위치 서울시 성북구 동서문로 26마길 2-15
대중교통 지하철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1번 출구 – 성신여대 정문 앞에서
좌회전 290m – 동서문로 26 마길 언덕 끝
승용차 동선동 주민센터 근처 보문로34가길 – 동서문로26길 – 대은빌딩(동선동1가 123-2) 주차장을 이용한다. 이곳에서아틀리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문의 02-3675-3401
권진규 연보
1922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42년 일본 유학
1953년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 졸업
1959년 귀국
1973년 자살
1998년 권진규 25주기전(가나아트센터)
2003년 권진규 30주기전(인사아트센터)
2009년 권진규 회고전(도쿄 국립근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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