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Tags
- 직업
- 10년 경험
- 부자의 길
- 신삼강오륜
- 지도자의 3가지 조건
- 부자의 세계
- 새로운 삶
- 한국인의 저력
- 온고지신
- 부자의 땅
- 부자
- 상선약수
- 아름다운 꽃
- 성난 황소의 돌진
- 부자의 약속
- 부자의 삶
- 성공의 선택
- 새로운 도전
- 부자의 인생
- 아름다운 세상
- 성공
- 성공의 길
- 신오복
- P세대
- 돈과 여자
- 경제의 힘
- 우리 몸의 세가지 보물
- 성공의 지혜
- 인재난
- 행복
Archives
- Today
- Total
시철과 신념
매씨서평을 읽고 배워라 본문
[강명관의 심심한 책읽기]다산 정약용의 책 빌리기
![](http://img.khan.co.kr/news/2015/06/11/l_2015061201001896700160132.jpg)
다산 정약용 이야기를 해보자. 다산은 알다시피 조선 최고의 학자다. 그의 학문은 실로 광범위해 경학, 문학, 사학, 경제학, 행정학, 음악학, 지리학, 언어학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힘을 쏟았던 분야는 경학(經學)이었다. 경학이란 경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하려는 학문이다. 주자학의 본령도 경학이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대한 기존의 모든 주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주해를 통해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고, 그 위에 자신의 장대한 철학을 축조했다. 주자 이후 사서의 해석은 그의 <사서집주>를 따랐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은 주자와 그 학파의 주해를 선택한 국정 표준 주해서였다. 여기서 과거 문제가 출제되었기에 이 두 주해서의 중요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명은 물론 조선도 대전본(大全本)을 표준 주해서로 삼았다. 그런데 대전본은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졌기에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드디어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가 <일지록(日知錄)>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이란 논문에서 대전본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조선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텍스트의 문제가 노출된 것이다.
한편 주자의 주해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모기령(毛奇齡, 1623~1718)이 경전과 역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자의 경전 주해가 오류임을 주장했다. 모기령은 주자에게 심사가 꼬였던지 주자의 학설이라면 괜찮은 것도 증거를 찾아 억지로 부정하는 짓을 서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모기령의 경학이 18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 수입되자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모기령과 아울러 경학에 일대 충격을 던진 사람은 염약거(1636~1704)였다. 유교 정치학의 오리지널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서경(書經)>(다른 이름은 <尙書>)은 원래 진시황의 분서(焚書) 때 사라졌다가 뒤에 다시 출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텍스트가 등장했는데, 그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어쨌거나 동진(東晉) 이후 <고문상서> 25편과 <금문상서> 33편을 합친 것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서경>이다. 이후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교과서 삼아 읽었다. 그런데 ‘고문’이라고 한 것이 문장이 읽기 쉽고, 금문이라 한 것이 읽기 어려운 등의 문제가 있었다. 학자들은 ‘고문’ 쪽이 수상했지만, 가짜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http://img.khan.co.kr/news/2015/06/11/khan_fU1W0i.jpg)
염약거의 업적은 엄밀한 문헌적 증거를 들어 ‘고문’ 쪽이 가짜라고 밝힌 데 있다. 너무나 완벽한 증거 앞에 더 이상의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고문’ 쪽의 <대우모(大禹謨)> 역시 가짜였고 <대우모>에 근거해 성립한 주자학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사사건건 주자의 학설이라면 반대하던 모기령이 이번에는 염약거에 반대해 <고문상서원사>를 써서 <고문상서>가 진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 학계에서는 <고문상서>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염약거와 모기령이 나와 <서경>의 절반이 가짜니 아니니, 주자가 옳니 그르니 하고 논란이 뜨거웠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 전해진 것은 대체로 1760년대 말부터다. 18세기 후반 경학 쪽에 전에 없던 논의들이 풍성해진 것은 대륙의 이런 학문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776년 즉위한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열고 경전과 역사에 대해 토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기령과 고염무의 학설이 검토되었다. <고문상서>의 진위도 다루어졌다. 다산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신유사옥 때 걸려든 다산은 강진 귀양지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의 거창한 경학 방면의 업적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 중 <매씨서평(梅氏書評)>이란 책이 있었다. <서경>의 절반인 <고문상서>가 동진(東晉)의 매색이 날조한 가짜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문제는 100년도 전에 염약거가 <상서고문소증>에서 이미 밝힌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산은 <상서고문소증>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다산만이 아니라 대체로 18세기 말까지 조선 학계는 모기령은 알아도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모기령의 <고문상서원사>가 <상서고문소증>을 의식해 저술되었는지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실 18세기 조선 학계에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1818년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매씨서평>의 원고를 홍현주(洪顯周)에게 보냈다. 홍현주는 정조의 사위고, 그의 형 홍석주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집안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매씨서평>의 원고를 본 홍석주는 홍현주에게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을 다산에게 보내라고 한다. <매씨서평>의 부족처를 보완하라는 의미였다. 책을 받아든 다산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이내 <매씨서평>을 고쳐나갔다. 홍석주는 노론이고 다산은 남인이었다. 평소 서로 오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홍석주는 다산이 필요한 책을 보냈다. 다산은 책의 말미에 홍석주 형제가 책을 빌려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 형제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매씨서평>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쪼록 책을 빌려줍시다!
'성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드시 해내겠다는 열정으로 도전하라 (0) | 2015.07.02 |
---|---|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라 (0) | 2015.07.02 |
세정석담의 구서를 알고 배워라 (0) | 2015.07.02 |
화려한 경륜을 가진 자도 은퇴는 한다 (0) | 2015.07.02 |
69세 소설가의 길은 험난하다 (0) | 201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