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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문을 열어라

신오덕 2015. 7. 17. 10:45
[매경데스크]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기사입력 2015.07.16 17:40:10 | 최종수정 2015.07.16 17: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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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주이란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란의 고대 서사시 `쿠쉬나메`에 `신라`라는 지명이 여러 번 등장한다는 이야기였다. 정변을 피해 고대 이란(페르시아)을 탈출한 왕자가 신라까지 도망을 가서 신라 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왔다는 설화가 `쿠쉬나메`에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궁금증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보니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다.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는 실제로 7세기 무렵 멸망한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유민들 이야기가 나온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민의 지도자였던 왕족 아비틴은 중국을 거쳐 바실라(Basila)에 도착해 바실라 왕의 환대를 받고 바실라의 공주 프라강과 결혼해 살다가 어부의 도움으로 다시 이란에 돌아온다. 그 이후 아비틴과 프라강 사이에서 태어난 파리둔이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군을 물리치고 조상들의 원수를 갚는다. `바(Ba)`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더 좋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풀이해보면 `바실라`는 `더 좋은 신라`라는 의미다.

물론 쿠쉬나메는 정통 역사서가 아닌 구전설화를 나중에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설은 판타지만은 아니다.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제품, 서양식 여신상이 새겨진 은제 그릇 등이 신라와 페르시아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분석한다. 경주 괘릉 무인석에 등장하는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곱슬거리는 콧수염을 한 인물이 페르시아인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처용(處容)이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화를 내기는커녕 춤추고 노래를 불러서 오히려 역신을 물리쳤다는 신라 설화에 나오는 그 처용 말이다. 사실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온 대인배 처용은 한반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에는 처용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신라 헌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기이한 몸짓과 옷차림을 한 사람이 임금 앞에 나타나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양했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다."

페르시아의 왕족 아비틴이 신라에 온 시기는 신라 헌강왕 집권기 무렵과 겹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헌강왕 관련 기록을 보자.

"3월에 왕은 동쪽 지방의 주·군에 행차했다. 이때 알지도 못하는 사람 4명이 어전에 나타나 노래하며 춤추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해의 정령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의 동쪽`은 울주(울산) 지역을 말한다. 처용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바로 그곳이다. 전해 내려오는 처용탈도 아무리 봐도 한국인과는 다른 형상이다.

지나친 판타지일지는 모르지만 처용이 혹시 아비틴을 따라온 페르시아인은 아니었을까?

대사관에 근무하는 친구는 이란 사람들이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 중 한 곳이 `테헤란로`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뿌듯해 하더라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알려진 것처럼 테헤란로는 1977년 서울시가 테헤란시와 자매결연을 하면서 생겼다. 물론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멜라트라는 지역에 있다고 한다.

몇 해전 이란에서 `대장금`이 9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두 나라의 긴 인연은 장면 장면이 참 예사롭지 않다.

바로 그 이란이 깨어나고 있다. 이란이 길고 지루한 서방 세계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나라의 문을 열었다. 대제국 페르시아가 다시 한번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덩달아 필자의 기분도 예사롭지 않다. 페르시아가 다시 내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랄까.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쿠쉬나메 필사본 원본 번역서를 읽어볼 수 있는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허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