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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하는 시간을 만들어라

신오덕 2015. 8. 24. 11:22
[사물의 철학] 티백-벗과 茶道 없는 차 가방
기사입력 2015.08.21 16:18:52 | 최종수정 2015.08.21 19: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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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고찰 대흥사 일지암은 추사 김정희와 일지암 암주 초의선사가 우정을 나누던 장소로 유명하다. 두 사람이 남긴 글은 서로가 서로를 사모하는 사이라고 적고 있다. 이 아름다운 정신 교류는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후세 사람들은 이 작은 암자를 조선 다도의 성지라고 부른다.

최근에 `차` 성지에서 스님과 함께 차를 작은 찻잔에 여러 번 우려 마시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추사와 초의가 만일 현대 도시인이었다면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와 세상의 우여곡절에 관한 생각을 그렇게 깊이 나눌 수 있었을까.

깊고 그윽한 생각의 나눔에는 그런 방식의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유장한 리듬`이 필요하다. 차를 반복해서 우려내고, 여러 번 계속 찻잔에 따라 마시는 `다도(茶道)` 형식이 그런 만남의 유장한 리듬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 형식이 명징한 두 의식이 대면하면서도 날카로워지지 않고 그윽한 대면의 시간을 지속시키게 하지 않을까. 과연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시대에 그들이 만나 대화를 했다면?

`티백`은 그윽한 차 향기를 `테이크아웃`할 수 있도록 만든 효율적인 사물이다. 차의 깊은 향기는 취하되, `다도`의 복잡성은 제거했다. 많은 다기가 필요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는 형식이 생략되어 있으며, 차를 어디에나 들고 다닐 수 있다. 형태상으로 중요한 특질은 `거름망`이라는 사실이다.

차는 본래 차나무 `잎`이다. 갈린 커피콩과 달리 찻잎은 녹지 않는다. 그래서 거름망이 필요하다. 티백은 차를 마시는 데 필요한 이 모든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티백은 종이 형태도 있고 면같이 직물로 된 고급 형태도 있다. 매끄러운 포장지를 뜯으면 잎을 담은 티백이 들어 있다. 그것을 물에 담그면 잎이 흘러나오는 법 없이 `향`만 딱 우려낸다. 종이든 면이든 잘 찢어지지 않으며, 망이 허용하는 만큼만 부푼다. 찻잎과 다기를 동시에 담은 이 사물은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깜찍하며 (물 샐 틈이 아니라) `잎 샐 틈 없이` 꼼꼼하고 효율적인 `차 가방`이다. 이 가방은 차를 가볍게 들고 다니며 대화자 없이 혼자 즐길 수 있는 현대 라이프스타일에 특화되어 있다.

남도 여행길에서 돌아와 도시의 한 모퉁이 카페에서 이 `차 가방`을 들고 혼자 차를 마시고 있다. 이 사물 덕택에 대화할 만한 벗이 없어도 차를 마시는 일이 자연스럽고 편리하지만, 그래서 또 쓸쓸하기도 하다.

[함돈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