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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세상에 나서기를 싫어한다

신오덕 2015. 8. 26. 09:44
[사진은 말한다] 알려지지 않은 얼굴, 1986년 9월 21일
기사입력 2015.08.25 17:35:04 | 최종수정 2015.08.25 19: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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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직원들이 창업자의 얼굴도 잘 모르는 신비한 회사가 서울에 있었다. 이 회사는 미원그룹(현 대상), 총수는 임대홍 회장(1920~)이었다. 임 회장은 평소에 술 담배도 안 하고 가끔 북한산과 도봉산을 찾는 것 말고는 회사와 잠을 자는 집만 왔다 갔다 할 뿐 복잡한 세상에 나서기를 싫어하며 점심도 주로 회사 집무실에서 설렁탕을 시켜 먹는 흔치 않은 기업가라고 했다. 미국의 갑부면서 은둔형이었던 하워드 휴스(1905~1976)를 연상케 했다.

어느 날 당시 미원그룹 간부로 있던 고등학교 은사님이 나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특히 임대홍 회장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하니 `사진을 찍는다`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몰래 찍어 달라고 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임병직 대사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임 회장의 얼굴을 찍는 날, 망원렌즈를 들고 숲 속에서 임 회장의 얼굴을 여러 장 포착했다. 카메라를 싫어한다고 해서 회장 성격이 예민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렌즈로 살펴보니 의외로 180㎝가량의 큰 키에 온화한 얼굴이었다. 기업가라기보다 교양 있는 학자풍의 차분한 노신사였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옆 사람과 조용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전혀 은둔형 기업가로 보이지 않았다.

이날 사진을 찍은 두 달 후 임대홍 회장은 은퇴식도 없이 회사 경영권을 장남 임창욱에게 넘겨주고 더 깊이 숨어버렸다. 임창욱 회장의 큰딸 임세령은 연세대 재학 중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이재용 부회장과 결혼했다가 11년 만인 2009년에 헤어졌다.

[전민조 다큐멘터리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