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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아량과 포용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라

신오덕 2015. 9. 16. 10:11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리더십

 

찬란한 중국 문화의 정수가 집약된 시기는 당과 송나라 때이다. 이때는 수없이 많은 석학과 당대의 명필, 시인들이 등장했고 그야말로 문치주의의 극치를 이룬 시기이다.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은 칼과 창으로 일생을 살아온 군벌 출신이다. 그럼에도 그가 나라를 세우면서 선택한 것은 잘 알고 쉽게 꺼낼 수 있는 칼과 창이 아닌 무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설득과 배려’였다. 시간과 노력은 더 필요했지만 그만큼 그 효과가 오래가는 리더십이었다.

 

중국의 수많은 왕조 중에서 소위 왕족이나 명문세가 출신이 아닌 이가 왕조를 세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삼국지 촉나라의 유비도 한나라 황족인 중산정후의 후손이었고, 돈 많은 환관 집안 양자 출신이란 조소를 들었던 조조도 나름 재력과 권력을 갖춘 세가 출신이다. 당을 창업한 이연과 이세민 역시 지방의 권력가였고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여진족이지만 당연히 한 나라의 수장인 왕족 출신이었다. 반면에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은 평민 출신으로 귀족 출신인 황우와 대별되는 리더십으로 나라를 개국했다. 또한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탁발승 노릇까지 했던 명나라의 주원장도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난’ 경우이다.

 

여기 또 한 명이 있다. 하급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에 쫓겨 20세에 군인으로 입대해 16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리더십과 처세학으로 나라를 창업한 바로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작은 이득으로 큰 것을 놓치지 마라

 

조광윤은 927년 중국 하북성 돈주에서 후당의 군인인 조흥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는 병사하고 동생 조광의, 조광찬과 배다른 동생 조광미가 있었다. 어머니는 두 씨 집안 출신으로 집안 형편에 비해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고 한다. 조광윤이 태어난 당시는 강력한 왕조였던 당나라가 멸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시기. 당시 정세는 많은 왕조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지방의 토호들은 나름의 무력으로 인근을 지배하는, 한마디로 난세였다. 이 시기를 바로 ‘5대10국의 시대’라고 후일 역사가들은 부른다. 당은 907년 멸망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이미 20여 년 전에 일어난 ‘황소의 난’이었다. 이때부터 당나라는 수도 인근만 황제의 명령이 통용되고 그밖에 지방은 주전충 등 각 절도사들의 분권통치로 이미 국가는 분열되었다.

 

후당, 후진, 후한, 후량, 후주 등의 다섯 왕조가 일어났고 오월, 형남, 초, 남당, 남한, 북한, 전촉 등 10국이 둥지를 틀고 곳곳에 자리를 잡아 그야말로 중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이때 조광윤은 후한에서 나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군 곽위의 군대에 입대한다.

 

이때가 946년 조광윤의 나이 불과 20세 때이다. 나름의 전공을 세우던 조광윤은 불과 2년 만에 곽위의 눈에 띄어 그의 참모가 된다. 곽위는 후한 은제 유승우의 숙청 계획을 알아내고 먼저 후한을 쳤다. 그리고 칭제를 선언하고 후주를 건국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조광윤은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아 개국공신의 서열에 오른다.

 

당시 곽위에게는 시영이란 양아들이 있었다. 이 인물이 주목할 만한 영웅적 풍모의 주인공이다. 곽위는 자신의 부인인 시황후 오빠의 아들인 시영의 능력을 높이 사 양자로 삼았고 시영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해 후주를 빠른 시간에 안정시키며 주변의 군벌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와중에 곽위가 그만 죽고 만다. 곽시영은 곽위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이가 바로 후주의 세종이다.

 

후주의 세종은 명군의 자질이 다분한 영웅이었다. 평소 세종은 ‘10년간은 세상을 평정하고 또 10년은 세상을 안정시키고 나머지 10년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조광윤은 이런 세종의 충실한 신하가 된다. 한번은 남당에서 조광윤에게 수만금의 뇌물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를 매수하기 위한 수법으로, 뇌물을 받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을 하려는 계책이었다. 하지만 조광윤은 뛰어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그 즉시 이 수만금의 재물을 세종에게 갖고 가 직접 보고하며 이를 군자금으로 쓰겠다는 계획까지 밝혀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 임해서는 놀라운 전술과 무공으로 승리를 얻었고 충성심에도 의심이 없어 조광윤은 후주 군대의 서열 3위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가 된다.

 

하지만 그에게도 세종의 감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은 어느 날 조광윤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된다. “조광윤이 항상 출퇴근 하거나 외출할 때마다 수레를 몇 개씩 갖고 다닙니다. 아마도 많은 재물을 착복하고 뇌물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세종은 불시에 조광윤을 불러 그 수레에 대해 물어보았다. 조광윤은 “수레에는 책이 들어있습니다”라고 보고했고 이를 확인해보니 조광윤의 말이 사실이었다.

 

세종이 물었다.

 

“어째서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항상 다니는가?”

 

“신은 어릴 때부터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해 학문이 부족합니다. 계책도 없습니다. 해서 많은 책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지혜를 얻으려 합니다.”

 

세종은 조광윤을 치하하고 큰 상을 내리면서 그에 대한 신임을 더했다. 이처럼 조광윤은 이른바 ‘학습의 DNA’를 타고난 셈이다. 세종의 주변 정복은 계속되었고 후주는 강력한 국가로 그 틀을 잡아나갔다.

 

그러던 중 959년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종 시영이 그만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후계자는 그의 아들 시종훈으로 불과 7세의 나이에 황위에 오르니 바로 그가 후주의 공제이다. 모든 권력은 재상 범질과 왕부가 장악하고 어린 황제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묘하게도 영웅의 노력도 큰 작용을 하지만 운 또한 절묘하게 작용한다. 바로 이 시기의 조광윤처럼 말이다. 그야말로 천운이 내린 것이다. 바로 세종 시영이 죽기 바로 전 단행한 인사에서 바로 후주 군대의 핵심인 금군의 대장에 조광윤을 임명한 것이다. 시영이 ‘금군 대장이 반역을 한다’는 역술가와 나라를 떠돌던 소문을 듣고 현직의 대장을 해임하고 조광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단박에 조광윤은 군권을 장악하고 후주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넓은 아량과 포용으로 적까지 품어라

 

960년, 거란과 북한(北漢)이 손을 잡고 후주를 공격한다는 보고가 조정에 들어온다. 조정에서는 바로 조광윤에게 금군의 반을 거느리고 출전해 거란을 토벌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금군의 나머지 군대는 수도에서 황제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때 수도에 남은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바로 석수신이다. 여기서 바로 주목할 것은 조광윤의 핵심 참모들, 그 중에서도 조보와 석수신이다.

 

조보는 조광윤이 왕위에 오르자 바로 재상으로 임명되어 조광윤을 보좌해 송나라 초기의 안정적 기틀을 세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그는 겉으로는 조광윤처럼 학문이 깊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논어>를 반만 읽은 채 조광윤을 보좌해 세상 사람들은 ‘조보가 <논어>의 반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후일 조광윤의 뒤를 이어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가 태종에 즉위하고도 조보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재상으로 태종을 보좌한다. 이때 조보가 “제가 읽은 <논어>의 반으로 태조를 보좌해 국가를 열었고 나중에 읽은 나머지 <논어>의 반으로는 태종을 충실하게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 많은 서적을 읽어 지혜와 계교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리고 석수신은 바로 조광윤과 의형제를 맺은 군대의 실력자로 조광윤의 충실한 오른팔이었다. 한마디로 후주 군대의 모든 전력이 조광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거란을 향해 행군을 하던 조광윤의 군대는 진교에서 멈춘다. 그리고 며칠을 쉬며 음주를 즐기기도 한다.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위한 출전하는 군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바로 여기서 조보의 계획이 시작된다. 조보는 나이 어린 공제가 황제의 위에 오르자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것으로 판단하고 이미 많은 장군들과 쿠데타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선 거란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침공한다는 거짓 보고를 만들어 금군을 조광윤이 장악하게 한다. 그리고 수도 개봉에서 조광윤이 군대를 이끌고 회군할 시 충돌 없이 바로 성문을 열 장수로 석수신을 이미 배치했다. 이른바 ‘진교의 변’을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정사와 야사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밤늦게까지 참모들과 술을 마신 조광윤은 아침결에 소란스런 소리에 눈을 뜬다. 그 순간 부하 장수들이 조광윤의 처소에 들어와 그를 모셔간다. 광장에는 수많은 장군과 병졸들이 이미 정렬해 조광윤을 기다렸다. 그들은 조광윤이 나타나자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 청을 한다. 이미 황제만이 입는 황포도 준비한 그들은 조광윤에게 황포를 걸치게 하고 황제에게만 외칠 수 있는 만세 삼창을 부르며 조광윤의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 이들의 명분은 ‘나이 어린 군주로 인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니 덕과 공이 충만한 조광윤이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조광윤은 못이기는 척 이들의 요청을 수락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조광윤은 그 자리에서 군대를 돌려 수도로 향한다. 이미 개봉부를 장악한 석수신이 내응해 문을 열고 조광윤은 그야말로 수도에 무혈 입성한다. 그리고 공제에게 왕위를 선위 받는 형태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송나라 태조이다.

 

이때도 조광윤의 리더십을 알아볼 수 있는 일이 발생한다. 군대를 돌린 조광윤이 성문에 도달했을 때 진교를 수비하던 장수가 그를 막아 세웠다. 그에 비해 봉구를 수비하던 장수는 바로 조광윤의 군대를 문을 열어 통과시켰다. 후에 조광윤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진교를 수비하던 장수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에게 상을 내려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는 이처럼 원칙에 충실한 부하들에게는 상과 칭찬으로 더욱 충성을 유도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국호를 송이라 정한 조광윤의 첫 번째 정책은 바로 자신이 모시던 세종과 공제에 대한 보복을 금지한 것이다. 그는 후대의 왕위에 오르는 자만이 볼 수 있는 비석에 글을 새겨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게 했다. 그 글의 내용은 첫째, 시 씨 왕족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고 항상 우대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충실한 신하의 솔직한 말을 항상 존중하고 설사 왕의 뜻과 다르다고 벌을 주거나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즉 언로를 열어두어 충직한 간언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후대에도 이 원칙은 지켜졌고 특히 시 씨 가문에 대한 공경은 진심으로 이루어져 후에 송나라 군대가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할 때도 시 씨 가문이 같이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조광윤에게 양위한 공제가 죽었을 때 황제의 예로 정중하게 장례를 치뤘다는 기록이 있다.

 

조광윤이 이처럼 시 씨 가문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 않은 것은 그가 모셨던 세종 시영에 대한 충성심도 있었지만 당시 민심을 얻기 위한 유화책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또한 조정에 상당수 남아있던 후주에 충성심 강한 사대부와 군대의 호응을 얻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가 범질, 조보, 반미 등 부하들과 함께 궁을 걷다가 한 후궁이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시 씨의 후손이란 것을 알게 되자 조광윤은 부하들에게 묻는다. “내가 저 아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조보가 답했다.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조광윤은 “내가 남의 자리까지 차지했는데 그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고 말하며 수행하던 반미에게 그 아이를 키우라 명령했다. 후일 조광윤은 한 번도 반미에게 그 아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즉위 직후 민정을 시찰하던 중에 시영의 부하 중 한 명이었던 장수가 조광윤에게 화살을 쏘았다. 다행히 화살을 피하기는 했지만 조광윤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일. 부하들은 분주히 범인을 잡으려 했지만 조광윤은 “잡지마라”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연회 자리에서 후주 출신의 한림학사 왕저가 구슬프게 울었다. 연유를 물어보니 ‘후주의 세종이 그리워서 운다’고 말했지만 조광윤을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처럼 차가운 칼과 창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출세해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근본적으로 송태조 조광윤은 배려와 따뜻함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설득과 배려는 칼과 총보다 강하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 조광윤은 내정의 안정을 꾀한 후 통일 전쟁에 들어간다. 10국 중 하나인 형남, 후촉, 남한, 화람 등을 잇달아 정복해 중국 북부지역에 강력한 송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지방 절도사의 군사력과 개국공신들이었다.

 

항상 어떤 왕조이건 창업에 성공하고 나면 공신들에 대한 처리문제가 대두되기 마련이다. 이때 해결책은 단 두 가지이다. 한나라 유방처럼 피의 숙청을 단행하거나, 당태종 이세민처럼 강력한 왕권으로 이들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다. 하지만 조광윤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가면서 시행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어느 날 석수신 등 공신들과 절도사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날 이런 자리에 오른 것이 모두 다 여러분들의 공이다.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편한 잠을 잘 수가 없다. 나는 당신들을 믿지만 당신들의 부하를 믿을 수가 없다. 당신들의 부하가 어느 날 반란을 권하고 당신들에게 황포를 입히려 하면 그것을 어떻게 거역할 수가 있겠는가?” 그 자리에서 모든 공신들과 절도사들은 입을 모아 “충성을 맹세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조광윤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어 지방에 내려가 좋은 집에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겠는가?”

 

그 다음날 절도사와 공신들은 모두 사임서를 제출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다. 훗날 이를 두고 ‘배주석병권 杯酒釋兵權’이라고 즉 ‘술 한 잔과 병권을 맞바뀌었다’라고 조광윤의 현명하고 탁월한 수단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다른 시각에서는 조광윤이 부하들에게 목숨을 보존하고 병권을 빼앗은 대신 그들에게 금력과 부패를 허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조광윤은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는 강력한 중앙집권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병권으로 권력을 장악한 장본인이기에 누구보다 그들의 존재가 갖는 미래의 두려움과 반란의 가능성을 아예 뿌리째 뽑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조광윤은 중앙에서 지방관리를 직접 임명하고 더구나 군인들의 집단을 다스리는 장으로 문관을 임명하는 이른바 문신 우위의 틀을 마련했다. 즉 그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피의 숙청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과 설득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쓴 것이다.

 

또한 전매 제도를 통해 중앙의 재정을 확보하고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특히 귀천과 신분에 관계없이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다양한 인재 발굴에 힘을 쏟았다. 또한 정복한 국가의 왕족들을 귀족으로 임명해 그들을 보호해 중국 역사상 피의 숙청과 보복이 없는 창업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조광윤은 열린 군주였다. 하루는 태조 조광윤이 장관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 재상이던 조보는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조광윤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조보가 또 상소문을 올렸다. 화가 난 조광윤은 조보가 보는 앞에서 상소문을 찢어버렸다. 조보는 태연히 발기발기 찢긴 상소문을 챙겨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찢어진 상소문의 조각을 일일이 맞추어 다시 조광윤에게 제출했다. 보통의 군주 같으면 벼락같은 화를 내고 조보에게 엄한 벌을 내렸겠지만 조광윤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보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임명한 장관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다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과, 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보의 충성심을 높이 산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조광윤은 새를 무척 좋아했다. 하루는 새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사관이 들어와 상소문을 올리겠다고 보고했다. 조광윤은 ‘별일 아니면 다음 날 하라’고 명령했지만 사관은 굳이 들어와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을 읽은 조광윤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중요치 않은 일이면 다음 날 보겠다는데. 이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나의 시간을 허비하는가.” 조광윤은 무기로 사관을 내리쳐 그의 치아를 부러뜨렸다. 사관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부러진 치아를 들고 일어서서 절을 했다. 기가 막힌 조광윤이 쳐다보자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사서에 기록하기 위해 나가겠습니다.” 순간 조광윤은 사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후일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항상 상소문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조광윤은 검소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많이 내보였다. 촉나라 왕 왕맹창이 조광윤에게 보석으로 장식된 요강을 선물로 바쳤다. 조광윤은 화를 내며 “이처럼 요강에도 보석 장식을 할 정도면 사치와 타락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그러니까 망국의 길을 걷는 것이다”라며 군주는 물론 관료들의 부패를 엄하게 경계했다. 이런 조광윤의 엄격함은 자신이 사랑하는 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공주가 물송새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의복과 모자를 쓰고 연회에 나왔다. 태조 조광윤은 딸을 불러 다시는 물송새 깃털로 만든 의복과 모자를 사용치 말도록 명령했다. 공주와 왕비가 이유를 묻자 조광윤은 이렇게 답했다.

 

“공주가 물송새 장식을 쓰기 시작하면 귀족과 관료들의 부인이나 여식들이 이를 쓰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평민들도 유행처럼 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물송새의 가격도 오르는 등 쓸데없는 소비가 나오게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매사를 경계해야 한다.”

 

왕비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일국의 황제가 금 장식도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되묻자 조광윤은 “백성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다 국가의 재산이고 나라를 경영하는 재산이지 군주의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엄하게 말했다. 이처럼 현명하고 너그러운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송나라 태조 조광윤. 그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진정성’이었다.

 

▶태조 조광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예로서 옛 은인을 살펴라

 

부하직원들을 작은 권한으로 괴롭히지 말라

 

조정의 창고는 나라의 재물이다. 백성들은 나라의 근간이니 이를 명심하라

 

아랫사람에게 예를 갖추고 서로를 배려해야 기강도 서는 것이다

 

진실한 자는 받아들이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배척하라

 

넓은 아량과 포용력으로 세상을 경영하라

 

인재는 항상 눈여겨 보았다가 중용하고 귀천과 신분으로 판단하지 마라

 

임기웅변보다 진정으로 조직을 이끌어라

 

조광윤의 리더십을 현대의 직장에 대입시키면 한마디로 평범한 리더와 마음으로 다스리는 리더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평범한 리더는 권모술수를 중시한다. 즉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력보다는 음모론, 평판, 소문 등등 각종 정보에 귀를 집중하고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에서도 과연 어떤 것이 회사 고위층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가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즉 노력 대비 효과가 큰 것, 또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을 기회를 찾아다니는 리더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충분히 사용하며 권한을 행사하는데 능숙하다. 이런 리더는 부하들의 복종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심의 충성심을 얻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리더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은 상하 관계 없는 어울림의 리더십이다. 걸핏하면 회식이다, 모임이다 해서 시도 때도 모이고 술 마시고 서로 소리 지르며 마음속의 앙금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풀었다고 자위하는 그런 리더십이다. 이것은 얼핏 소통과 단결이 잘 이루어지는 조직처럼 보이고 서로의 감정이입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원칙과 책임 앞에서 경계가 모호해져 조직의 기강이 무너지는 리더십이 되는 것이다.

 

  설득과 인내의 달인

 

하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으로 조직원 모두를 승자를 만들겠다는 배려가 있는 리더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리더십의 특징은 바로 태조 조광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는 능력이다. 여기서 희생은 조직원의 해고나 전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조직 전체의 효율을 목표에 집중시킬 수 있는 리더의 탁월한 현실 분석이 우선되는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 그는 귀로 듣고, 눈으로 익히고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진심으로 남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난 군주였다. 그의 리더십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엄한 벌보다 강한 것은 따뜻한 배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