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박성우, 신용목 엮음/188쪽·1만 원·창비

책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1번으로 시작된 ‘창비 시선’이 400번을 맞아 나온 기념 시선집이다. 나희덕 문동만 강성은 시인을 비롯해 창비 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시인 86명의 시를 한 편씩 모았다. 모두 책 한 페이지 안에 들어가는 짧은 시다. 엮은이들은 “이를 두고 단시(短詩)라고 불러도 좋다.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랐다”고 했다.
한 시인의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읽으며 깊은 숲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느낌은 얻을 수 없지만, 각 시집에서 촌철의 장면들만 모아 보는 맛이 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귀로 운다”(김주대 ‘부녀’)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중)
숫기 없고 예민한 족속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썼을 ‘시인의 말’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재미도 시 본편 못지않다. “너무 속속들이 읽지는 마시고 곁눈으로 대강 훑어보시길 부탁드린다.”(권지숙) “시를 쓴다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힘든 작업에 비해 소득이 적은 예술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껏 불평한 적이 없다.”(민영)
‘창비 시선’의 책 번호가 100번대 중반이던 20년 전 시집 한 권은 5000원 안팎이었다. 과자값은 그동안 열 배 가까이 오른 것 같은데, 시집 가격은 두 배가 됐다. 무더운 여름, 몰디브에는 가지 못해도 일상에서 ‘러스티 네일’(녹슨 못 또는 거친 발톱) 같은 감각을 체험하는 값으로는 너무 헐한 것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