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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용기있지는 못한다

신오덕 2019. 12. 4. 08:59

"하버드대 명성도 '30년 수행' 승복도 '자유' 찾아 벗었죠"

조연현 입력 2019.12.03. 20:16 수정 2019.12.04. 02:36


[짬] ‘참선’ 에세이 펴낸 태오도르 준 박

환산 스님 30년 만에 본명을 되찾은 테오도르 준 박이 지난 11월 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승복을 벗고 속세로 돌아와 쓴 책 <참선>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하버드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무려 30년간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행을 한 승려가 있었다.


1987년 ‘깨달은 선각가’로 소문난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93) 스님을 찾아온 그는 22살의 청년이었다. 재미동포였지만 한국말을 전혀 못했고 귀걸이를 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용화선원의 힘겨운 행자와 사미 과정을 버텨내고 환산 스님이 됐다. 시자로서 15년간 송담 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그는 2년 전 돌연 환속해 자취를 감췄다.


그가 최근 2권짜리 <참선>(나무의마음 펴냄)을 출간했다. 환산 스님이란 법명 대신 테오도르 준박(54)이란 이름의 그를 지난달 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2세 엘리트 청년 1987년 ‘깨달은 스승’ 찾아 한국으로 인천 용화선원 송담 스님 제자로 출가 2년 전 ‘환산 스님’ 법명 버리고 환속


‘구도자였을까, 송담 스님 추종자일까’ “무엇이든 오래 즐기면 중독될 수밖에”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테오도르 준 박은 한국 선불교 78대 법손인 송담 스님(맨 앞)의 법제자로 출가해 1990년 환산 스님 사미계를 받았다.

먼저 ‘왜 그토록 유망한 젊은이가 먼 나라의 사찰에서 그 간난신고를 감내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속의 부와 권력의 불빛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정신적 방황을 완전히 끝낼 깨달음이 절박했다는 것이다.


그는 “송담 스님을 깨달은 스승으로 확신해 찾아갔고, 만약 그가 목사였다면 목사가 됐고, 신부였다면 신부가 됐고, 화가였다면 나도 화가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즉 불교에 귀의한 것이 아니라 송담 스님에게 귀의했다는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송담 스님에게 복종하고 충성했다. 용화선원 안팎에선 그를 ‘넘버2’라고들 했다.


그런데 ‘왜 30년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 종교 한 집단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특별한 위치나 신분으로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만, 용화선원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의 책 <참선>은 놀랄만큼 세심한 관찰과 감정 표현, 솔직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환속을 하게 된 속내는 털어놓기 어려운 눈치였다.


선원 시절 그는 되도록 숨고 싶어하는 은둔형 스승과 어떻게 해서든 그 은둔자를 만나보려는 대중들 사이에서 철저히 스승을 방어하고자 했다. 때문에 그가 대중은 물론 다른 상좌(제자)들과의 접촉을 막고,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눈총도 쏠렸다. 그가 함구할 수밖에 없는 의미를 짐작해 볼 뿐이다.


그는 스승이 내려준 ‘이 뭣고’(이것이 무엇인가)란 화두를 의심하는 선 수행자였다. 그가 의심한 것은 화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승려들 못지 않게 전통적인 스승과 사제의 연을 중시하며 살아왔지만, 영민한 엘리트 출신답게 종교시스템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늘 회의하고 의심했다.


책에는 ‘나는 구도자였을까, 송담 스님의 추종자에 불과했을까’, 환속의 동기가 얼핏 엿보이는 대목이 있다. ‘성인이 된 후로 줄곧 엉뚱한 곳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기준과 관점에 연연해왔다는 것을.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땅 속에서 금을 찾다가 결국 그 땅을 놓쳐버린 꼴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승에 대한 믿음과 참선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책에는 스트레스와 상처투성이인 현대인에게 참선이 얼마나 절실한지에 대한 설명도 구구절절하다.


하버드대 친구들로 책의 추천사를 써준, 그에게 참선을 배우기도 했던 김용 세계은행 총재나 세바스찬 승 프린스턴대 교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처지다. 그런 세간의 출세는 커녕 이제 승려조차 아닌 무직자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22살 청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다시 송담 스님에게 갈 것”이라고 했다. 의외였다. 그 30년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이다.

환산 스님 시절 2013년부터 송담 스님에게 전수한 전통선법(활구참선법)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불교티브이> 등 방송에서 강의와 대중법회를 했다.

승복을 벗은 그에게 ‘용기 있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게 용기있지는 못하고 걱정은 됐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도 승복이 주는 권위는 대단하다. 그는 30년간 쌓아온 권위와 기득권을 버려버린 것이다. <불교티브이>에서 7년간 참선 강의 방송을 하고, 고대·동국대·서울대·연대·이화여대 등에서 가르치며, 용화선원 신도들로부터 큰절을 받던 스님이 더는 아닌 것이다.


“명성이나 권력은 마약과 같고, 세상에 마약을 거부하는 유전자 같은 것은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오래 즐기면 중독되고 말아요. 여성과 돈, 권력에 깊이 빠지면 중독될 수 밖에 없지요”


그의 말대로 참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적인 습관, 즉 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다.


출가를 주저하는 그에게 출가를 권하며 환산(還山·산으로 돌아오라)이란 법명을 붙여준 스승을 떠나 그는 추운 광야로 나섰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이다. 참선보다 더 한 구도행을 시작한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