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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산행을 한다 본문
[개척 산행 르포_원주 취병산]
첫 데이트처럼 달콤쌉싸름한 개척 산행
글 신준범 차장대우 입력 2022. 03. 04. 09:55 댓글 3개
원주 문막읍 섬강변의 바위명산, 100년 만에 이름 알리기
취병산 정상의 구멍바위에서 로프 하강한다. 우회로가 결빙되었고, 하단 4m 벽이 홀드 없는 이끼바위라 안전하게 하강을 택했다.
새로운 산이 그리울 때가 있다. 국립공원, 100대 명산, 200대 명산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산을 오르고 싶을 때가 있다.
인터넷에 이름조차 없는 산을 지도 한 장 들고 오르는 고행.
가시덤불과 잡목, 때론 낭떠러지가 시험에 들게 하겠지만, 예민하게 감각의 날을 세우고 긴장감 넘치는 산행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슴 두근거리는 산행이 하고 싶다.
그렇다고 1,000m 넘는 험산 절벽을 개척등반으로 오를 실력이나 시간은 없었다.
당일에 승부 낼 수 있는 산이 필요했다.
등산로 없는 산이야 지천이지만 약초꾼도 아닌데 종일 잡목만 헤치다 내려오고 싶진 않았다.
여러 포털의 위성지도를 보고 또 보았다.
능선에 바위가 있어 한 번쯤은 시원한 경치를 봐야 개척산행의 긁힘도 감내할 수 있을 터.
개척산행은 수풀이 우거지기 전인 이맘때가 최적기다.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김미진(왼쪽), 김지윤, 최동혁씨.
며칠 만에 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암벽등반으로 유명한 원주 간현산 곁에 있는 산줄기. 강이 흘러 간현산과 능선이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주능선에 바위 몇 개가 눈에 띄었다. 특히 400m쯤 되는 정상부 암릉은 스케일이 작지 않아 해볼 만했다.
그곳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분과의 전화통화로 산 이름이 ‘취병산’이라는 것, “등산로는 없으며 송전탑이 몇 개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곳 주민들은 취병산 산세가 절벽마냥 가팔라 정상으로 오르는 이는 거의 없다며 산행을 만류했다.
다만 사유지 철조망이나 입산금지 안내판은 없어 굳이 산행하려면 가능은 하다고 일러 주었다.
산 족보를 보면 백두대간 오대산 자락에서 갈라져 나온 한강기맥이 강원도를 횡으로 가르며 뻗을 때, 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성지지맥 말미의 짧은 곁가지다. 지맥에서도 주능선이 아닌 갈라져 나온 이름 없는 산줄기인 것.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잔잔한 바위가 늘어난다. 적절히 우회와 돌파를 택하면 어렵지 않다.
조사해 보니 취병산翠屛山은 나름 내력이 있었다.
‘취병리’란 지명이 산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예부터 이곳에선 알려진 산이었다.
취병翠屛은 꽃나무 가지를 틀어서 병풍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주능선의 직벽 바위에서 유래한 것인 듯하다.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도 이름이 없는 잊혀진 산이 100여 년 만에 진면모를 드러내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산은 산이다. 게다가 한 성질하는 바위산. 대학산악부 재학생들로 개척산행 팀을 꾸렸고, 만약을 대비해 로프와 하네스(안전벨트)도 준비했다.
진밭골이 섬강과 만나는 합수점에서 산행을 시작해 능선을 타고 취병산 정상에 올랐다가, 서쪽으로 무명봉을 거쳐 취병저수지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잡았다.
행여 어린 대학생들을 무모한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닌가 싶어 산행 전날부터 긴장되었다.
잔설과 낙엽이 쌓인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안전에 최우선을 둬야 하기에 명산 산행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길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아침부터 강원도는 한파주의보로 시원하게 맞아주었다.
포털의 로드뷰를 통해 봐둔 길로 들어서자, 축구장보다 넓은 모래 공터가 나왔다.
차를 세우고 중등산화 끈을 질끈 묶고 단단히 산행 채비를 했다.
연세산악회 최동혁, 이대산악부 김미진·김지윤씨가 길을 나선다.
폭도 같은 칼바람이 살을 푹푹 찔렀으나, 미지의 세계로 든다는 두근거림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등고선으로 본 것과 실제 지형은 느낌이 달라, 섬강 방면의 완만히 누운 능선을 들머리 삼기로 했다.
반쯤 언 섬강이 찬란했으나 경치를 볼 여유가 없었다.
먼저 올라 정말 위험하면 그때그때 경로를 수정해야 했기에 혼자 걸음이 바빴다.
미세하게 뻗은 능선 끄트머리를 붙잡고 오르자, 밖에서 보이지 않던 산길이 보였다.
주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자, 약초꾼이 다니는 길인 듯 했으나 사람 발자국은 없었다.
잔디봉을 지나면 테라스가 있는 작은 암봉이 나온다. 여기서 본 섬강과 문막 일대가 장관이다.
길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차피 산길은 없으니 집착을 버리자’는 생각과 동시에 마음이 편해지고 동선은 자유로워졌다.
빠르게 고도를 높이는데 희미한 임도 같은 길이 보였다.
임도를 따라 사면 옆으로 넘어서니, 무덤 개괄지다. 실망이다.
위성지도로 본 첫 번째 바위는 회색빛 흙이 덮인 20여 평의 개인 묘였다.
위성지도 해상도에 한계가 있어 오해한 것. 칼바람 속에 멈춰 있을 틈은 없다. 곧장 오르막에 몸을 던진다.
선명한 산길이 보인다. 산길을 버리고서야 산길을 만나다니, 예상치 못한 걸음걸음에 수수께끼 풀 듯 재미가 있다.
신나게 오르막을 치고 올라서자, 숨은 보물 같은 경치가 사방에서 안겨온다.
두 번째 바위라 판단한 곳은 잔디가 있는 무명봉(276m) 개괄지다.
무언가 측정하기 위함인지 깃대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만 있을 뿐 순수한 전망 터다.
발아래 흐르는 섬섬옥수의 섬강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지난겨울 이야기를 한다. 멀리 치악산 줄기가 꼿꼿한 선으로 남아 다시 한 계절을 받아 삼키고 있었다.
열린 경치를 오늘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벌써 두 번째 전망 터다.
능선을 잇자 작은 바위능선 위에서 동쪽으로 시야가 툭 터진다.
고생길이 될 거라고 일행에게 몇 번을 주입식으로 일러 주었는데, 다들 희희낙락이다.
나름 재미있는 개척산행지를 발굴한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산을 개척하여 오르는 최동혁씨. 한파주의보에 강풍까지 합세해 개척산행의 난이도를 자연스럽게 높여 주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산이 시험하려 든다.
294m봉에서 주능선 같아 보이는 곳이 지능선이다.
몇 걸음 내려갔다가 되돌아 온 탓에 알바(산길 잘못 드는 걸 뜻하는 산꾼들의 은어)를 면했다.
눈은 적으나 낙엽의 바다라 할 정도로 부서지는 잎사귀가 깊다.
송전탑을 지나자 해발 200~300m를 오르내리던 능선의 파도가 거칠게 몰아붙인다.
정상이 가까워오자 호위병 같은 바위들이 덤벼온다. 압도적이진 않지만 조금 까다로운 바윗길. 이끼와 낙엽, 얼음이 있고, 잡을 데가 없어 고민되는 바윗길.
일행은 우회하고, 돌아가기 귀찮은 나는 미끄러지며 바위를 내려온다.
암릉구간을 조심스럽게 넘어서는 김미진·김지윤씨.
예상치 못한 대단한 카리스마
남덕유 축소판이다. 육십령에서 대간 줄기를 따라 가면 남덕유산 동봉과 서봉이 압도적인 험산의 카리스마로 일대를 제압하는데, 마치 그 모습을 줄여 놓은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쌍봉의 등장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봉은 일신봉(402m)이고, 서봉이 취병산 정상(412m)이다.
정상은 나무로 둘러싸인 숲인가 싶었는데 더 진행하니 기다렸던 바위의 출현이다.
구메바우(구멍바위)라 불리는 칼바위에 올라서자, 막강한 고도감과 함께 겨울 산경이 펼쳐진다.
성지지맥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아직 흰 옷을 입고 있다.
1만 군사가 얼음화살을 쏘는 것마냥 흉포한 바람이 덜덜 떨게 한다. 이 칼바위 위가 취병산 정상이다.
예상대로 아무런 표지판이나 정상석은 없다.
내려가는 길이 문제다. 구멍바위 직전 왼쪽 우회로가 결빙되었다.
바위 끝은 절벽이라 더 진행해서 우회하는 건 어렵다. 절벽 중간에서 가져온 로프로 하강을 택한다.
능수능란한 산꾼이라면 로프 없이도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으나, 마지막 4m가 홀드 없는 이끼바위라 사고를 예방하려 안전한 방법을 택한다.
하강보다 어려운 건, 피할 곳 없는 칼바람. 바들바들 떨리는 통에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뿐이다.
일행이 하강하고 마지막으로 내려서는데, 30cm가 넘는 바위가 들썩인다.
아차 싶어 “낙석!”을 외치고 조심스럽게 발을 뗀다.
다행히 바위는 떨어지지 않았으나, 일부러 떨어뜨리기엔 바위가 너무 커 다른 낙석을 일으킬까봐 살금살금 하강한다.
구멍바위를 하강하는 대학산악부원들 뒤로 문막과 여주의 산들이 펼쳐진다. 취병산 정상은 산행의 백미로 꼽을 만큼 시원한 고도감을 자랑한다.
진짜 고역은 내리막 능선이다. 검숭이고개로 이어진 비탈이 원체 가팔라 스틱을 잡은 손과 발가락에 힘을 꽉꽉 줘가며 내려선다. 능선이 희미하고 나무가 높아 길찾기 모호한 것도 관건이다.
고개까지 거의 다 내려온 듯한데 지나치게 잡목이 많다. 진행이 어려울 정도, 결국 60m를 되돌아가자 왼쪽으로 내려선 희미한 흔적이 있다.
검숭이고개에서 다시 능선을 타고 오른다. 하산했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 분위기라, 일행의 사기가 떨어져 있다. 정상을 내려서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을 들인 탓이다.
행동식과 보온병에 담아온 꿀물로 다시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이후로는 수더분한 육산의 잡목을 헤치는 길이다.
개척산행의 즐거움은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과, 시원한 경치와 함께 긴장이 풀어질 때의 성취감에 있다. 왼쪽부터 김지윤·김미진·최동혁씨.
인가의 개들이 시끄럽게 짖는 작달막고개. 오후 4시, 해는 넘어가고 352m봉 능선은 지도에서 본 것보다 덩치가 크다.
시무룩한 얼굴로 “야간산행도 괜찮다”는 일행을 시멘트길로 이끈다.
겨우 6km 온 것일 뿐이지만, 혹독한 날씨에 개척산행과 촬영으로 몸과 마음이 충분히 지쳤다.
드문드문 있는 시골집마다 개를 키우고 있어 작달막고개를 내려서는 내내 개 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길 없는 길을 걸은 탓에 인가의 개 짖는 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다시 섬강 앞에 서자, 노을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어느 유명한 산을 타고 내려올 때보다 더 개운했다.
산행길잡이
산 입구 찾는 것이 관건이다.
문막읍 취병리 957-1번지 농가에서 왼쪽 비포장 길로 들면 축구장만 한 넓은 비포장 공터가 있다. 여기서 섬강 쪽 둑방을 따라 가면 지능선을 타고 취병산에 올라설 수 있다.
취재진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송전탑과 무덤을 잇는 더 선명한 산길이 농가 부근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덤 혹은 잔디봉까지 오르면 산길은 비교적 선명해 어렵지 않다.
다만 긴장 풀고 걸으면 지능선을 주능선으로 착각해 알바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간간이 암릉구간이 있으나 적절히 우회와 돌파를 하면 어렵지 않다. 정상부는 서쪽으로 가팔라 주의해야 한다.
정상 구멍바위 앞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면 로프가 없어도 내려설 수 있다. 이후로는 길이 희미하다.
시간과 체력을 고려해 검숭이고개에서 검숭이골로 하산하는 것도 방법이다. 작달막고개에는 시멘트임도가 있어 여기까지 승용차로 들어올 수 있다. 섬강 합수점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원점회귀 코스는 총 10km이다.
개척산행 특성상 소요 시간은 천차만별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교통
섬강 합수점의 농가는 문막읍내에서 5km 거리이다.
택시로 10분이면 닿는다. KTX 경강선 서원주역에서 10km 떨어져 있다.
자차로 올 경우 문막읍 취병리 957-1번지 농가에서 왼쪽 비포장 길로 들면 축구장만 한 넓은 비포장 공터가 있다.
막국수
맛집
문막읍내에 식당이 많다.
문막덕곡막국수(0507-1436-5514)는 막국수(7,000)와 메밀만두(5,000원)가 인기 있다.
한끼밥상(0507-1307-1541)은 찌개와 6가지 반찬이 나오는 정식(6,000원), 김치찌개(7,000원), 생선구이(8,000원)가 별미인 부담 없는 백반집이다.
장터추어탕(033-735-2025)은 얼큰한 추어탕(1만 원)이 산행 후 허전한 속을 달래기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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