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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국보 제304호를 찾고 조선의 업적을 확인한다 본문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시무국가'가 뜻하는 것
오문수 입력 2022. 03. 07. 10:18 수정 2022. 03. 07. 11:12 댓글 32개
[오문수 기자]
▲ 여수 진남관에서 고소대로 가는 길가 담벽에 그려져있는 벽화로 '약무호남시무국가'라는 문구가 보인다. |
ⓒ 오문수 |
임진·정유 두 왜란 당시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데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도수군과 군수물자를 제공해 병참기지 역할을 한 호남인들의 역할이 컸다.
진남관(국보 제304호)은 전라좌수영성과 삼도수군통제영성의 내부에 있던 중심 건축물이다. 진남관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고소대로 가는 길 주변 담벽에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소대 비각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벽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고 전장을 바라보는 모습과 함께 새겨진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문구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후 1년쯤 지난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상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竊想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이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란 뜻이다.
"약무호남시무국가"는 학창 시절 왜란에 대해 배울 때 수없이 들었던 것으로 군복무 시절 호남 출신을 차별하는 '따블백'이라는 은어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위안을 삼던 용어였다.
필자는 요즈음 이순신 장군과 여수 좌수영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내친김에 이순신 장군이 호남을 사랑하며 말했던 이유에 대해 증명해보기로 했다.
▲ 여수지역사회 연구소가 3D로 복원한 여수 좌수영성 모습으로 바다에 인접한 성벽 가까이 있는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 진남관이다. 여수 좌수영성은 임진 정유의 두 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발한 발진기지이다. 진남관은 왜란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며 군무를 관장했던 곳이다. |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15만 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상륙한 지 20일 만인 5월 3일에 한양을 함락시켰다.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7월 23일에는 함경도 회령까지 점령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100일이 채 못 되어 전라도 및 강원도 일부와 평안도 북부 및 청천강 이북을 제외한 조선 전역이 왜군의 발굽에 짓밟혔다. 한편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기 때문에 경상도좌·우 수군은 전멸상태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본영 및 관하 5관(순천,낙안,보성,광양,흥양) 5포(방답, 사도,여도,발포,녹도)의 수령 장졸과 전선을 전라좌수영에 총집결시켜 전라좌수영 함대를 편성했다. 전라좌수영 관할 5관 5포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흥양현(현 고흥) 경내에 1관 4포의 수군진이 집중되어 있었다.
▲ <임진장초>에 근거해 만든 표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과 전라우수군이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군과 합세해 왜수군과 전투를 치른 4대해전(1592년 5월~8월) 자료를 표로 만들었다. |
ⓒ 오문수 |
<임진장초>에 근거해 만든 위 표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을 섬멸하기 위해 5월 4일 여수를 떠났다. 전라좌수군 함대(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85척이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군 6척(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해 옥포해전을 치러 적선 42척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경상우수군 배가 6척 밖에 참전하지 않았으니 전라좌수군의 1/15밖에 안 된다.
"처음에 상륙하는 적병을 본 원균은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했다. 전선 백여 척과 화포·군기 등을 바닷속에 내다버렸다. 그는 수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 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해서 곤양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만여명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우수군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과 합류한 날짜는 6월 4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수군이 왜수군을 섬멸하기 위해 첫 출전한 1592년 5월 4일부터 8월 24일 네 번째 출전한 부산포해전까지 참전한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 함대를 합치면 도합 363척이다.
위 표를 보면 조선수군이 왜수군을 섬멸하기 위해 4번째 출전한 부산포해전 기록에는 경상우수군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3차 출전해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 당시 경상우수군 함대 7척을 포함한다고 가정해도 23척 밖에 안 되니 경상우수군과 전라좌우•수군 함대 비율은 1/16밖에 안 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 함대는 8월말의 부산포해전까지 12차례의 크고 작은 접전 끝에 왜선 330여척을 격파했다. 이 때문에 왜수군은 온통 '이순신 공포증'에 사로 잡혀 우리 수군만 보면 도망쳐 버렸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 1권과 <일본사서>에 의하면 왜란은 7년간에 걸친 긴 전쟁이었지만 우리 수군이 왜수군을 거제도를 경계로 잘 막아주었기 때문에 곡창지대이며 병력 공급원이 될 전라도 지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서해 바다도 장악함으로써 아군의 통신 연락과 명나라 군사의 원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한편 제해권을 빼앗긴 왜군은 그들의 병력이동과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소위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차질을 가져와 대륙원정계획이 파탄났다.
조선수군 최고사령부 삼도수군통제영은 왜란 중 여수에... 통영 이전은 종전 3년 후인 1601년
▲ '여수가 삼도수군통제영이 되다'라는 그림으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이 선조 26년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영이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그림이다. |
ⓒ 오문수 |
즉 1대 이순신, 2대 원균, 3대 이순신, 4대 이시언이 모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제수받았으며 이순신이 3년 8개월간 한산도에 머물렀다고 하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전초기지에 불과할 뿐이다.
종전 3년 후인 선조 34년(1601년) 3월에 '전라좌수영이 해상방어상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다'는 이시언 통제사의 호소로 경상우수영(거제도 가배량)으로 옮겨 선조 37년(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 때 경상우수영과 더불어 현 통영시로 옮기게 됐다.
"본영(여수 좌수영)으로부터 우수사 우후 이정충이 와서 우도(경상)의 놀랄만한 일들을 많이 알려 주었다. 체찰사에게 편지 공문을 썼다. 경상도 우수영의 영리(營吏)가 체찰사에게 갈 서류의 초안을 갖고 와 보고하였다"
여수가 중심이 된 호남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수군이 전쟁터로 나선 발진기지이자 병력 충원, 전선의 건조·보수, 군수물자 제공을 담당해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구국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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