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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철과 신념
[스크랩]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1 본문
![](http://www.rotc23.pe.kr/travel/145-1.jpg)
나는 여러가지 점에서 성격이 참 못된 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성미가 무척 급한 편이다. 조금 빨리 할 수 있음에도 어슬렁대면 울화통이 치민다. 그리고 못마땅한 것을 보면 잘 못참는 편이다. 그래서 긁어 화를 자초하는 실수를 가끔 하곤 한다. 회사에서도 회의시나 업무지시에 부당한 것이 있으면 직선적으로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잘 따지는 사람 좋아하는 상사 없으니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 지 짐작할 일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많이 뜯어 고쳤지만 성격이 급하다 보니 우선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화부터 내는 습관이 있다. 그러니 별 것 아닌 일에도 가족들이 스트레스를 받게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http://anglerstown.com/deokcheon.gif)
두 번째는 돈이 참 헤픈 편이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은 것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돈 쓰는 법을 잘못 배워서인지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못써서 안달이다. 그러니 돈이 모일 리가 있겠는가. 덕분에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 빼고 아주 값비싼 보석이나 자동차 같은 것 빼고는 어지간한 것 다 수중에 넣어 봤던 것 같다.
하여간 내일 평양 가고 싶으면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갔다 와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지금은 신용카드가 있으니 그런 경우는 없지만 예전에 어디 출장이라도 다녀올라치면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달랑 남겨놓고 집에 돌아오곤 한 적이 부지기수였으니 어느 정도로 돈관리를 잘못 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리라 믿는다.
![](http://anglerstown.com/ddeokcheon.gif)
'내 故鄕 덕산 가는 길'
중학교 2학년 때의 일로 기억된다. 수학여행 가기 전이었으니까. 수학여행비 내라고 준 돈을 가지고 친구랑 둘이서 부산 구경을 갔었다. 쉽게 얘기하면 무단가출을 한 것이다. 내가 살던 고향은 경남 진주에서 지리산 쪽으로 승용차로 약 30분 정도 들어가면 나타나는 덕산이라는 시골 면소재지이다.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지리산을 등반하는 코스 중에서 제일 짧은 코스가 중산리로 올라가 천왕봉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오는 코스인데 덕산이라는 곳이 중산리와 대원사를 가는 중간기점에 있다. 예전에 내가 어릴 때에는 워낙 산골이라 덕산 유도골이란 애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많이 개발이 되어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진주에서는 약 15~20분 정도, 부산까지는 1시간 30분에서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하지만, 예전에 내가 가출할 당시에는 부산까지 갈려면 5시간이 족히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런 먼 곳을 겁도 없이 중학생 둘이서 나섰으니... 그것도 생판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http://www.e-jirisan.co.kr/fall/a14-1.jpg)
가출 얘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나의 어릴 적 환경에 대해서 조금더 얘기를 할까 한다. 나는 태어난 이후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줄곧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 둘이 전부다. 동생들은 전부 네 살, 세 살 터울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지만 대구에서 작은 어머니와 딴살림을 하였기에 자라면서 아버지는 거의 볼 일이 없었다. 어쩌다 찾아오는 경우에도 어머니에게 돈을 뜯어러 오는 경우라 늘상 다투는 모습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저가 살던 동네는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외가 친척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보니 아버지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야금야금 살림을 거들내어 어머니 얘기로는 제법 많던 논밭을 어머니 몰래 팔아 작은 부인에게 갖다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아 있는 전답이라곤 겨우 우리집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 딱 좋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계속 당하면서 외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남은 전답을 모두 어머니 앞으로 명의이전을 하였기에 그나마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가정형편이다 보니 학교 갔다오면 농사일 거들고, 아니면 지게지고 나무하러 가야 하는 게 하루의 주된 일과였다. 농번기일 경우에는 늦은 밤까지도 어머니와 논밭에서 일을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봄.가을이면 누에까지 치다보니 학교는 그저 하는 수 없이 다니는 것이고 농사일과 누에치는 일, 그리고 나무하는 일이 히루 일과중에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뼈빠지게 고생하여도 하얀 쌀밥은 고사하고 까만 꽁보리밥이라도 굶지않고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 요즘 애들이 상상이나 될런지... 그 뿐이랴, 농사만로는 살기도 힘이 드시니 어머니는 틈만 나면 나물이라든지 버섯을 캐러 깊은 산중에 들어가선 저녁 아홉시나 열시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녹초가 되어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러면 나는 학교 다녀와 어머니가 못다한 농사 일과 애 돌보는 일, 저녁준비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캐 온 버섯이나 나물, 그리고 산딸기나 머루, 다래 등 돈이 되는 것은 다 따다가 그 중에서 좋은 것은 골라 시장에 내다 팔고 상채기가 난 것은 우리에게 주셨었다. 하물며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까지 따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고, 도토리가 나는 계절에는 도토리묵을, 겨울철 농한기에는 시루떡을 만들어 시장터 추운 노상에서 떡장사를 하셨었다.
하여간 무엇이라도 돈되는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해야만이 우리들 학비라도 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린 마음에 어찌 어머니의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으랴. 어린 막내동생 보재기에 싸서 들쳐업고 다니는 것도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고, 농사일이며 저녁에 밥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지금은 43살이 되었고,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지만 막내동생은 어릴 때 거의 내가 업고 다니면서 키운 동생이다. 등에 업고 있는데 오줌이라도 눌라치면 빨래도 내 담당이니 괜히 화가 치밀어 나한테 맞기도 하고 그렇게 큰 동생이 지금은 의엿한 성인이 되어 아들 딸 둘 낳아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다.
바로 밑의 동생은 올해 46세인데 오래 전에 이혼을 하여 지금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정신질환의 일종인 간질이 있는 여자인 줄 모르고 결혼을 했던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중매를 선 것이었는데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오빠되는 사람도 저와 같은 회사에 중견간부로 근무하고 있으며 나와도 일면식이 있는 처지라 자세하게 알아 보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던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그 집에서도 악의적으로 속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대로 얘기하기 또한 아마도 힘들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오빠 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장남이고 부친을 일찍 여의어 집안의 가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가엾은 여동생이 시집이라도 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을 터이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렇게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나 나나 무거운 짐을 하니씩 걸머쥐고 있는 셈이다.
![](http://www.e-jirisan.co.kr/spring/a1-1.jpg)
어릴 때 둘 째 동생이 유독 나한테 많이 얻어맞고 컸었다. 집안이 어려우니 도시락을 싸들고 다닐 형편이 못되어 점심시간이면 약
2킬로 정도 되는 집에까지 뛰어와 점심을 먹고가곤 하였었다. 그런데 바로 아래 동생이 학교를 일찍 파하여 집에 먼저 와선 내 밥까지 다 먹어
버리는 불상사(?)가 종종 발생하곤 했던 것이다.
유달리 먹는 것에 욕심이 많던 동생인지라 먹을 것을 앞에 두면 주체가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 먼 길을 달려 점심을 먹으러 왔는데 빈그릇만 달랑 남아 있다면 그 때의 기분이 어떠할 지 충분히 짐작이 될 것으로
믿는다.
배는 고파죽겠는데 밥은 이미 동생이 다 먹어버리고 없고... 화는 머리 끝까지 치솟으니 안맞고 배기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서글픈 기억이지만 그 당시엔 철이 없는 나이인지라 동생은 내 밥까지 다 먹은 죄로 맞아서 울고, 나는 때리면서 자신이 섧어서 같이 울곤
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가출얘기로 되돌아가겠다. 하여간에 그런 생활 자체가 어린 마음에도 지긋지긋하여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가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하고 죽마지우인 조재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하고 늘 같이였다.
기껏해야 그 친구의 외갓집 또는 나의 외갓집이 있는 진주로 도망가는 게 고작이었지만 국민학교 다닐 때만 두번인가 가출을 시도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엔 고향 덕산에서 진주까지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이고 차를 타고도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임에도 둘은 걸어서
진주까지 가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꼬마였던 것 같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까 아마 6살이었지 않나 싶다. 이모와 같이 진주에 갔다가 주차장에서 이모가 화장실 다녀온다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어린 마음에 이모를 잊어버릴까 봐 괜히 이모를 찾아나섰던 게 서로 길이 엇갈려 그만 이모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http://www.e-jirisan.co.kr/summer/a3-1.jpg)
그 당시 진주에는 버스 주차장이 두 곳이 있었는데, 덕산에서 출발하여 원지를 경유해 가는 버스는 진주극장 건너편에 주차장이 있었고, 수곡을
경유하는 버스는 지금의 육거리인 망경북동에 주자장이 있었다. 대부분의 버스가 원지를 경유하여 가는데 그 길은 하도 많이 다녀봐서 훤히 외고
있있고 이모 없이 혼자서도 가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외갓집을 찾아가곤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날은 수곡을 경유하여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바람에 길이 생소하여 외갓집 가는 길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혼자서 길을 헤매이다가 백차(그 당시의 경찰
패트롤카)를 보고는 차를 세워서는 대뜸 우리 외갓집을 찾아달라고 하더란다. 경찰이 하도 기가막혀 너희 외갑집이 어디이며 외할머니며 외삼촌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외할머니 성함은 최신림이고 외삼촌은 조상영 등등...
그리고 외갓집 위치도 봉곡동 로타리 옆의 어디 어디라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더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외할머께선 친, 외손을 통틀어 손주로는 내가 맞이이고 엄청 애지중지하였던 터라 이모는 조카를
잃어버려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다.
이모가 전화로 할머니한테 나를 잊어버렸다고 했더니 애 찾기 전에는 집에 오지말라며
호통을 쳤던 모양이었다. 이모는 그 때까지도 주차장 주변을 맴돌며 울며불며 나를 찾고 있었는데, 나는 유유히 경찰 백차를 타고 외갓집을
찾아왔으니 그 이후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하여간에 어릴 적에도 맹랑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경찰이 돌아가면서 할머니
보고 하는 말이 이제까지 이렇게 맹랑한 놈 처음 봤다며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경찰의 백차를 타고 외갓집을 찾아 가면서도 집을 잃어버린 애처럼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아저씨 여기는 어디죠? 저 건물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하는 식으로 계속 질문을 해대더라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누구를 만나면 그 때의 일을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 듯 자랑처럼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똥배짱(?)은 아마도 생활이 그렇게 만들었지 않나 싶다. 어머니가 산에 가서 너무 늦으면 어머니가 간 행적을 항상 사전에 말하고 가기
때문에 아무리 늦은 깜깜한 밤중이라도 산중 깊숙히 어머니를 마중 나가곤 했던 것이 어린 나이에도 대범함을 갖도록 만든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http://www.e-jirisan.co.kr/winter/a5-1.jpg)
중학교 2학년 때 두번 가출을 하였었다. 한번은 친구의 돈으로 따라나섰고, 또 한번은 나는 수학여행비를, 내 친구인 재규는 소 판 돈 일부를 가지고 가출을 했었다. 둘 다 농사 일이 항상 지긋지긋했던 터에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시로 나가 취직해 돈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첫번째 가출에서는 진주에서 하룻밤을 연인숙에서 묵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 구경도 다니며 취직자리를 알아 보았지만 어린 우리를 써 줄려고 하는 곳은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결국 돈은 바닥이 나고 우리는 겨우 끼니를 때울 돈만 남겨 놓은 채 거지마냥 잠은 아무데서나 자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는 하수도관을 쌓아둔 곳을 찾아 잠을 잘려고 들어갔는데 거지들이 자고 있어 쫓아낸 다음 우리가 거기서 자고 있는데 한 잠이나 들었을까. 갑자기 후래쉬 불빛이 강하게 얼굴을 비쳤다. 누군가 싶어 눈을 떠보니 범일동 파출소의 방범대원들과 경찰이었다. 그 사람들 눈에 우리가 거지처럼 보이지 않아서인지 파출소까지 끌고갔다.
거기서 추궁끝에 가출을 실토하였고 우리는 끝내 부모님들에 의해 고향으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고향이 잡혀가선 나는 별로 그렇게 많이 혼나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감나무에 묶여 아버지에게 몽둥이로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후에 친구로부터 들었다.
![](http://www.rotc23.pe.kr/travel/146-1.jpg)
두번째 가출은 수학여행을 앞두고 실행에옮겼었는데, 바로 진주로 나가 취직자리를 물색했지만 공장은 나이가 어려 어림도 없었다. 겨우
둘이 찾아들어간 곳이 현재의 진주농림전문대학 후문에 있는 허름한 빵공장에 겨우 숙식만 해결해 주는 조건 비슷하게 취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운 여름 날씨에 요즘처럼 에어컨도 없는 시절이라 낙후된 창고같은 빵공장내는 오븐의 뜨거운 열기와 한증막 같은 습한
공기가 어우러져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사흘만에 보따리 싸짊어지고 그만두었다. 실내가 너무 덥고 뜨거워 밀가루 포대자루 자른 것을 허리만
감싸고 위에도,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한다면 그 모습이 상상이 될런지 모르겠다.
밀가루 포대는 땀에 절어
시꺼먼 때가 더덜더덜하고 땀은 비오듯 하고 거지도 그 보다는 깨끗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는 수 없이 수소문 끝에 찾아간 곳이 직업소개소였다.
거기서 내 친구인 재규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만두전문집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일반 중국집에 취직이 되었다.
월급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그저 먹고 자며 그나마 희망이라면 중화요리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톱밥난로도 피워야 하고, 일이 끝나면 짜장면 만들 무우 썰어 놓는 일도(그 당시에는 무우를 잘게 썰어 짜장을 만드는
시절이었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배달 또한 내가 도맡아 해야 했으니 일인삼역 아니 사역도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뿐이랴. 주방장 눈에 거슬리면 볼때기는 주방장 것마냥 대놓고 있었으니 누구에게 하소연 할 때도 없고 하루의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면 혼자서
집나온 것을 후회도 많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지러진 물인 것을...
![](http://www.e-jirisan.co.kr/img/gallery-1.jpg)
![](http://www.e-jirisan.co.kr/img/gallery-2.jpg)
내가 처음 취직한 곳은 지금은 없어진 중안동에 있는 국보극장 앞의 신흥루라는 중국집이었다. 차츰 중국집 생활에 조금씩 적응이 되자 급여가 전혀 없는 그곳에 있기가 싫어졌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본 끝에 진주공고 앞의 중국집(지금은 잊어버려 중국집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음)으로 옮기게 되었다.
거기서 2개월인가 있다가 그 집보다 조건이 훨씬 나은 진주여고 앞의 회성루라는 중국집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긴 것이 회성루의 위치가 바로 나의 외갓집과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던 당시로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집에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집에서는 나 말고도 배달을 하는 나 또래의 친구가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번갈아 배달을 다니며 중화요리 만드는 법도 배우고 그랬었다. 그렇게 중국집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육개월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진주여고 교무실에서 배달주문이 들어왔다. 모자를 푹 뒤집어 쓰곤 배달을 나갔다. 혹시 외갓집 식구들이 길가다 나를 발견하여도 못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를 가만히 그곳에 있게 놔두지를 않았다. 어느날 배달을 갔다가 돌아와 홀에서 난로가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손님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무심결에 얼굴을 보니 큰외삼촌과 작은 외삼촌 그리고 이모와 어머니였다. 가출한 지 거의 팔개월만에 극적(?)인 가족간의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때가 아마 3월 중순쯤이나 되었을 것이다. 막 신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다시 집으로 끌려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나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듣곤 재규네 부모님들도 득달같이 진주로 달려왔다.
재규는 어디에 있냐고 추궁하였지만 나는 끝까지 가출한 이래 바로 헤어져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고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재규와 누가 먼저 잡히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언약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의리라고 생각하였고 재규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http://www.e-jirisan.co.kr/img/gallery-3.jpg)
![](http://www.e-jirisan.co.kr/img/gallery-4.jpg)
그렇게 해서 나는 중학교 2학년 1학기말에 도망 갔다가 3학년 초에 복학을 하게 되었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퇴학처리가 되었겠지만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학교에 찾아가 빌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다시 학생으로 되돌아갔고, 재규는 영영 학교로 되돌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후회막급한 일이지만 그 당시의 내 생각으론 재규는 다시 잡혀 집으로 끌려가면 맞아 죽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도저히 바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재규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항상 마음속에 빚이
되어 가슴을 짖누르곤 한다. 재규는 학교 다닐 때 성적도 좋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지도 모르겠다. 현재 재규는 개인택시업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 때의 내 실수로 인해 재규 앞날을 망친 것 같아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진 기분이다.
내가 못 됐다는 얘기를 하다가
글이 너무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린 것 같다. 앞에서 말한 단점 이외에도 주당(酒黨)에다가 애연가이며 아버지로부터 본받지 말아야 할 바람끼마져
있으니 정말 못된 것은 다 갖춘 인간이지 않나 싶다. 예나 지금이나 잘 변하지 않는 것이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 하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과 잘 타협하지를 못한다.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다. 그러다 보니 유연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내가 앞으로 많이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또 나는 예의가 없는 사람들은 잘 나고 못나고를 떠나 병적으로 싫어한다. 특히 능글능글한
셩격을 딱 밥맛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두루두루 사귀지 못하고 나에게 맞는 사람들과만 친교하는 대인관계에서의 조금은 바람직하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하나 하나 바꾸어 나가 볼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다. 더욱이 칼럼을 쓰고나서 더 많은 반성의
계기가 되었지 않나 생각해 보며 앞으로도 이런 나의 단점들을 부단히 고쳐 나가도록 노력해 볼 생각이다.
※ 이 글은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사진과 글 사이즈가 안맞아 다시 수정해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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