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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과 헐버트

신오덕 2005. 6. 6. 08:58

 

[이규태 코너] 베델과 헐버트


 


 
입력 : 조선일보 2005.06.02 18:51 05'
 

지난 100여년 동안 고국의 운명처럼
 
떠돌고 버림받아왔던 국보 경천사
 
(敬天寺) 13층탑이 용산 박물관에 자리
 
를 잡았다.
 
 
이제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비원을 금판(金板)에 새겨 진공 상태로
 
보존한다 하니 눈물겹다.
 
 
이 석탑은 일본 입김이 거세었던
 
1907년 당시 세자이던 순종의 결혼식
 
에 하객으로 참여한 일본 궁내(宮內)
 
대신 다나카(田中光顯)가 욕심을 내어
 
밤중에 뜯어 일본으로 옮겨갔던 것을
 
한국을 사랑하는 두 외국인 언론인의
 
투쟁으로 일본이 되돌려 놓은 문화재다.
 
 
곧 문화재 외적(外的)인 정신가치가
 
부가된 석탑으로 그것을 되뇔 필요를
 
절감케 한다.

 

 


개성 인근 폐사에 서 있던 이 석탑은,

 

이 탑에 빌면 만병이 통치된다는

 

약황탑(藥皇塔)으로 팔도에서 사람이

 

모여들었기에 하룻밤 사이의 증발에

 

소문이 퍼졌고, 이에 격분한 영국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裵說)이 그가 간행하던

 

영자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이

 

사실을 확인, 폭로했다.

 

 

이에 당시 통감부계 영자지인 ‘서울

 

프레스’와 일본 정부 대변 영자지인

 

‘재팬 메일’지는 허위·모략 보도라고

 

반박했고 베델은 갖은 압력과 협박·

 

회유를 박차고 사실을 배경으로

 

대논쟁을 벌였었다.

 

 

이 와중에 당시 헤이그 밀사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미국 언론인 헐버트가

 

일본 고베에서 발행하는 최대부수의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에 ‘누가 석탑

 

을 훔쳐갔는가’를 비롯, 여섯 차례에

 

걸쳐 석탑 도적질을 신랄하게 비난

 

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가서도

 

당지 신문 ‘쿠리에 드 라 콘페란스’에

 

석탑 약탈 사실을 기고했고 미국의

 

유력지 ‘뉴욕 포스트’도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자 일본의 일간지 ‘만조보’

 

‘고베 신문’ ‘도쿄 저널’ 등지에서

 

이를 받아 보도하여 당시 조선 통치를

 

하던 이토(伊藤博文) 등을 곤욕에

 

빠뜨렸다.

 

 

일본이 내세운 한국의 보호통치의

 

상징이라고, 이 석탑 약탈사건이

 

국제여론으로 파급되자 감당할 수

 

없었던 데라우치(寺內) 일본 총독은

 

이를 반환, 경복궁 회랑에 방치해둔

 

채 광복을 맞은 것이다.

 

 

복원된 13층탑 곁에 민족과 정의를

 

위해 싸운 베델과 헐버트의 사적(事蹟)

 

및 공적비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