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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라하 이야기1 - 낭만적이고 비낭만적인 구시가

신오덕 2005. 6. 6. 09:01

프라하, 구시가지


    여행에서 돌아온 것은 7월 중순인데, 역시 초저속 굼벵이답게 이제야 칼럼을 재개하는군요. ^^;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제가 여행한 곳은 중북부 유럽이었어요. 베를린에서 사흘, 코펜하겐에서 사흘, 다시 베를린에서 하루, 그리고 프라하에서 나흘 있었죠. 베를린과 코펜하겐 사진들은 아직 정리가 안 돼서 프라하 이야기부터 할까 합니다.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베를린에서 아침 7시 반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출발! 역에서 파는 크루아상을 입에 물고 커피를 들고 말이죠. 놀기 위해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그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번에 유럽에 있을 동안 저는 아침형 인간이었죠... 프라하까지는 5시간쯤 걸립니다. 중간에 기차가 강을 따라가는데, 강가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묘하게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시키기도 했어요.프라하의 홀레쇼비츠 역 Nádraží Holešovice 에 도착해보니, 베를린 역들에 비해 좀 구리구리하더군요... 하지만 이용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프라하, 카를     지하철로 갈아타고 (함께 여행한 친구들 중 하나는 처음 가는 나라에서도 순식간에 지하철 이용법을 터득한답니다) 프라하 관광의 중심지라는 카렐 다리 Karlův Most -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중세 돌다리! - 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으로 고른 호텔이 그 근처였거든요. 지하철 객차 속은 역과는 딴판으로 밝고 깔끔하고 특히 빨간 의자가 산뜻하더군요.

◀ 자신의 다리를 시찰하는 카를4세 (1975)
by 스른코바 Emma Srncova (1942-, 체코)
45 x 55 cm, 유채

    카렐 다리는 카를 4세 Karl IV (1316-1378) 때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카를 4세는 프라하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죠. 이때 프라하는 중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요.

    카렐 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인 구시가 Staroměstská 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계단을 수트케이스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갔습니다. (프라하는 서울처럼 지하철 계단에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도 있고 있는 곳도 있답니다) 예스러운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길을 따라 돌바닥에 요란한 바퀴소리를 내는 수트케이스를 끌고 전진한 끝에 (다행히도!) 금방 호텔을 찾았죠.

    호텔은 카렐 다리와 직선으로 이어진 골목에 있고 몇 걸음밖에 떨어져있지 않아요. 그래서 호텔로 들어서면서 카렐 다리의 입구인 구시가 교탑 Staroměstská Mostecká Věž 을 볼 수 있었습니다. 뾰죽한 지붕과 첨두형 아치문을 지닌 단아한 중세 탑이었어요. 그런데 교탑의 문을 통해 다리 위를 보고 그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리 위의 어마어마한 인파가 마치 주말의 명동 거리나 코엑스몰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프라하, 호텔 “디 아더스” 따라하기     우리가 머물 호텔의 이름은 U Zlatého Stromu, 황금나무를 뜻하는 조그만 호텔입니다. 옆의 사진에 보이는 것이 호텔의 전면이죠. (호텔 외부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려서 대신 어느 여행정보 사이트에서 퍼온 사진을 올렸답니다 ^^; ) 옛날부터 있던 건물을 리모델한 것이라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일반 호텔에서 카드 키를 주는 것과 달리 이 호텔에서는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준답니다!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호텔 정문이 아닌, 옆에 붙은 안뜰로 통하는 대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열쇠 꾸러미에서 가장 큰 열쇠로 열어야 하죠. 안뜰 중간에 하얀 계단이 있는데, 계단 입구에 쇠창살문이 있습니다. 이걸 둘째로 큰 열쇠로 열고 들어간 다음 다시 잠가야 해요. 계단을 올라가 회랑을 따라가면 복도로 통하는 문이 나옵니다. 이 문을 작은 열쇠로 열고, 조금 더 가서 같은 열쇠로 안쪽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어야 하죠. (다행히 이 문들은 안 잠가도 된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잠급니다... 헉헉...영화 "디 아더스 The Others"에 출연하는 기분이었죠...

    아래 제가 찍은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낮은 천장의 복도 벽에는 예스러운 장식화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방은 커다란 나무 옷장(골동품처럼 짙은 색깔에 반들거리는...정말 골동품이었을지도...?)이 있는 작은 현관방과 화장실, 그리고 기묘하게 길쭉한 좁은 침실로 나뉘어 있었죠. 침실에는 아치형 벽감마다 금박의 푸른 커버로 덮인 침대가 하나씩 들어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재미있는 방이었어요. (친구 하나는 옛날에 하인방으로 쓰던 방일 거라고 주장하더군요. -_-)

프라하, 호텔2

프라하, 호텔1

    호텔 식당에서 소를 박아 구운 버섯과 샐러드 같은 것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그 식당에는 파스타부터 초밥까지 전세계 메뉴가 다 있더군요...다행히 맛이 괜찮았어요 ^^) 프라하의 명소인 구시가 광장 Staroměstske Naměsti 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프라하의 명소들은 대부분 1지구에 몰려있어서 카렐 다리에서 시작하면 어디든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지요. 칼럼 맨위의 사진은 구시가 광장 입구에서 제가 찍은 것이랍니다. 왼쪽 앞에 보이는 것은 14세기에 지어져 여러번 개축된 구시가 청사 Staroměstská Radnice 이고 오른쪽 뒤에 보이는 것은 역시 14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틴 성당 (정식 이름은 틴 앞의 성모 마리아 성당 Chrám Matky Boží pøed Týnem)이죠.

    구시가 광장은 이미 11세기에 형성되었고 중세 상거래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격변의 장소이기도 했죠. 유럽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보헤미아 출신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Jan Hus (1369-1415) 가 로마교회에 의해 화형당한 후 그의 지지자들이 봉기한 곳이기도 하고, 17세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킨 보헤미아인들이 처형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곳도, 20세기 중반 공산당의 집권 계기가 된 유명한 연설이 이루어진 곳도 이 곳이었죠.

프라하, 구시가전경
출처: Prague Information Service(www.pis.cz)


구시가 광장의 전경

화면에서 틴 성당의 왼쪽에 있는 붉은 지붕의 큰 건물은 18세기에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킨스키 궁전 Palac Kinskych 입니다.
광장 가운데로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얀 후스의 동상이 보이죠.

프라하, 구시가
출처:www.webshot.com

르네상스 양식과 혼합 양식의 건물들

프라하, 미쿨라셰
출처:rene.spika.cz

바로크 양식의 미쿨라세 성당 Chram sv.Mikuláse

운치 vs. 번잡함    구시가 광장과 그 근처에는 틴 성당 같은 단정하고 신비로운 고딕 건축물들이 화사한 르네상스 양식의 집들과 장엄한 바로크 양식의 교회들과 섞여 있습니다 - 위에 퍼온 사진들을 한번 보세요. 현대적인 건축물은 거의 없습니다. 건물들의 전반적인 색채는 강렬하기보다는 조화롭지요. 절제되고 시원스러운 모더니즘 건축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베를린과 동화적인 발랄한 원색의 북유럽 르네상스 양식 건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코펜하겐과는 또다른 프라하만의 매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천년의 시간을 간직해온 장소에서는 이곳에 공존하는 여러 시대의 건축물이 속삭이는 전설과 역사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아득한 속삭임 같은 건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 떠드는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더군요. -_- 이곳에서 삶을 누렸고 투쟁했고 또 죽어간 옛 사람들에 대한 명상을, 마치 바벨탑에서 들리는 것 같은 갖가지 말들 -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등등 - 이 방해하더군요. (한국어도 자주 들렸지요) 저도 물론 관광객이었지만, 정말 관광객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하긴, 그들 모두 저와 똑같은 불평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

프라하, 시계탑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많은 관광객은 처음이었답니다. 베를린은 관광지로 발달한 도시가 아니고 코펜하겐은 관광산업이 발달했지만 살인적인 물가 탓인지 외국인 관광객이 아주 많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프라하는 현지인보다도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보이니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연히 거리의 가게들도 관광객 대상의 비슷비슷한 기념품점, 크리스털 가게, 가닛(석류석) 보석상 (크리스털과 가닛은 체코의 특산물!) 그리고 바가지 씌우기 좋아하는 환전소 일색이었죠.

    이건 내가 생각한 프라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여행책자의 “전위적 중세"나 “보헤미아의 낭만” 같은 문구를 보며 상상했던 우수 어린 반항정신과 예술적 광기가 서린 도시가 아니었죠 -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유적지는 물론 연주회 같은 것도 너무 관광상품화돼 있어서 외화 벌이에 영혼이라도 팔 도시로 보였답니다.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과도기의 현상일 거예요. 게다가 집중적인 관광지로 발달한 1지구에서 또 기껏해야 며칠 머무른 사람이 이 도시의 참모습을 알긴 어렵겠지요. 그래서 나중에 프라하에 또 갈 기회가 생긴다면 1지구가 아닌 곳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천문시계의 참을 수 없는 썰렁함     구시가 광장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은 장소는 구시가 청사 시계탑 앞입니다. 이 탑에는 프라하의 명물인 천문시계가 붙어있죠. 위에 제가 그 시계를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시계를 찍고 있는 누군가의 팔이 나왔네요. ^^;) 15세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시계로 세 개의 바늘이 각각 해와 달, 별의 이동에 따른 시각을 가리키죠. 아래에는 원형의 달력이 있고요. 프라하에 머문 동안 매일 이 천문시계 앞을 지나다녔는데, 정작 시계 치는 걸 본 것은 마지막날이었습니다. 여행책자들을 보면 시계 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써있죠.

프라하, 결혼식     "매 정시마다 천문시계가 치는데 꼭 봐야할 진풍경이다...인간 공통의 죽음의 운명을 상징하는 해골이 줄을 잡아다니고... 창문이 열리며 예수의 12제자상이 돌아나오고... 옆에 붙은 유대인상과 터키인상이 움직이고... 시계탑 아래에 운집한 관광객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어쩌구저쩌구..."

    그러나...이 말은 좀 구라입니다... 시계탑 앞에 관광객이 운집해 시계 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맞는데 막상 시계가 치고 나면 모두 썰렁해 합니다. 튀어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저 사진에도 보이는 두 개의 작은 창 안으로 12사도상이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시계 옆에 붙은 해골과 유태인, 터키인 등의 상이 움직이는지는 정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알 수 있죠. 워낙 미세하게 움직이니까요... -_- 아, 썰렁썰렁~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시계 자체는 참 아름답다는 것이죠...

    그날 정작 시계탑 앞에 운집한 관광객들을 박수치며 환호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시계가 칠 무렵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의 행렬이 나오는 거예요! 그들은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으니 오래오래 행복할 겁니다. ^^ 사진이 흔들려서 유감이네요... 신부가 진짜 예뻤는데.

프라하, 화약탑 첼레트나 거리에 유령이 남아있을까?    구시가 광장에서 이어지는 첼레트나 Celetna 거리로 걸어가면 그 끝에 서있는 화약탑 Prašná Brána 을 만나게 됩니다. 카렐 다리의 구시가 교탑과 아주 닮은, 뾰죽 지붕과 첨두형 아치문을 지닌 탑이죠. 약간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단정한 매력이 있는 고딕 양식의 탑이었습니다.

    이 탑이 구시가 교탑과 닮은 데에는 이유가 있더군요. 이 탑은 15세기에 구시가로 통하는 성문으로서 지어진 것인데, 역시 카렐 다리에서 구시가로 통하는 성문으로서 14세기에 지어진 구시가 교탑과 짝을 이루도록 디자인된 것이라 합니다.

    첼레트나 거리에 대해 어느 여행잡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름은 중세 때 처음 구워진 주름진 모양의 롤빵 이름에서 유래한다.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의 하나인 이곳에서는 유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둡고 바람부는 날이면 유령들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타나기도 하고…”

    내가 이 거리를 걸은 건 맑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둡고 바람부는 날에도 이 거리에 나타날 것은 유령이 아니라 환전상이나 연주회 전단 나눠주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던걸요... ^^;


    그럼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는 화약탑 옆의 시민회관에서 연주회를 본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 원래 "미술관의 비밀도서관" 카테고리와 "미술관 휴게실" 카테고리의 업데이트만 뉴스레터로 발송하는데, 하도 오랜만의 업데이트라서 ^^;; 이번만은 다른 카테고리의 글이지만 뉴스레터로 발송했습니다...

 
가져온 곳: [Moon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  글쓴이: Moon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