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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재 윤두서의 <유하백마도>

신오덕 2005. 12. 2. 13:09
 

 공재 윤두서의 <유하백마도>입니다..


공재 윤두서는 해남 윤씨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입니다.

20여년의 유배와 25년간의 은거로 삶을 대부분 보낸 윤선도는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특히 문학적 감수성과 뛰어난 어휘 구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또한 [어부사시사]와 [산중신곡], [오우가]등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성에 있어서는 그의 문학적 성향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과도기적 성격과 윤선도가 주자학은 물론 의약, 복서, 음양, 지리, 음악 등에 다양한 학문적 관심으로 박학(博學) 했다는 점 때문이고 이는 증손인 공재 윤두서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었습니다.


공재 윤두서가 차지하고 있는 회화사에서의 비중은 실로 엄중합니다.  중국의 화풍에서 벋어나 조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진경시대를 열어젖히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서양식의 정물화를 최초로 그렸고 추후 김홍도, 신윤복에서 꽃피우는 민속화의 핵심인 리얼리티를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회화사가 들은 그런 공재 윤두서를 시대의 선구라고 보기 보다는 시대의 종말 쪽에 무게를 두어왔습니다. 대표적인 미술가가가 이동주입니다. 또한 다른 분들도 선구적 측면보다는 과도기적 측면에 무게 중심을 두어왔습니다. 오주석, 유홍준 등 같은 분들도 그런 견해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런 평가가 불만스러웠습니다. 시대적 제약이란 말 자체도, 시대적 제약을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시대적 한계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회화는 분명 과도기적 측면 보다는 시대적 선구적 측면에 주목해야 하고 그가 보여준 전신사조의 자세와 리얼리티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현재 부여 박물관장님이신 이내옥 님의 저작인 <공재 윤두서>에서 지적한 시대적 선구라는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공재에 대한 모든 평가는 이내옥 관장님 연구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하백마도> 윤두서 비단에 담채 34.3cm x 44.3cm 해남 녹우당 소장

 

 

공재 윤두서는 모든 부분에 박학다식한 가풍을 이어받아서 매우 재주가 뛰어난 분이였습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재주가 그림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나는데 인물, 산수, 민속화, 동물화 등등 다양한 장르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동물화중에서 말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18세기 초 당대 최고의 서화 비평가인 남태응은 공재의 말 그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공재의 말 그림과 용그림은 신의 경지에 들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필적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니, 또한 두 사람(김명국, 김시)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따라서 그 수법은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르고 화격은 중국적인 것에서 환골탈태했다. 형상과 물체가 더욱 핍진하고 더할 수 없이 정미해, 공교함이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공재의 이름은 일세에 희자되고 강희안, 김시, 김명국 등의 작가를 뛰어넘어 공민왕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고 말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강변으로 생각되는 곳에 버드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그 앞에 하얀 말 한 마리가 서있습니다. 바람은 시원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고 있고 말의 자태는 당당하고도 기품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순서를 먼저 살펴보면 제일 먼저 주인공인 말을 그리고 이어 언덕을 그린다음 마지막으로 버드나무를 그렸습니다.

 

주인공인 백마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공간을 시원하게 잡아 답답함을 없앴고 화면의 1/3 지점에 위치한 버드나무와 말의 몸통이 겹치면서 그림의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렸지만 오른쪽에 그림의 핵심인 말의 머리를 두고, 말머리 아래 무거운 돌덩이를 두어 완벽한 대칭구도를 회복했습니다. 버드나무 가지는 앞쪽은 진하게 뒤쪽은 흐리게 그려 원근감을 살렸고 바람의 방향을 암시하는 휘어진 모양의 버드나무 가지로 인해 생동하는 봄기운을 순간적으로 포착했습니다. 

 

색의 조화도 진한녹색의 마방굴레, 빨간색의 고삐가 흰색의 말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편안하면서도 생동감을 잃지 않았고 자유스럽지만 기품이 넘치는 멋진 그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핵심은 역시 말입니다.

 

말 전문가들의 입장으로 보면 공재의 백마는 완벽한 준마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공재의 백마는 등이 짧고(말의 허리가 길면 흉위가 작아 폐활량이 적고 심장의 활동도 적다고 합니다) 평평하며 목과 다리의 비례도 완벽하고 볼기와 허벅지의 볼륨도 적당하며, 말발굽도 날카롭지 않고 각도도 작당해서 준마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뺨의 도톰함과 약간 처진 눈으로 인해 후덕한 인상을 주고 목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앞가슴까지 곧장 내려 꿋꿋한 기백을 살렸습니다.

 

눈에서 뻗어내려 콧등까지 이어지는 곡선과 콧구멍의 표현은 공재 말 그림의 전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많은 말 그림중 공재 작품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털들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재갈이나 안장도 없이 아주 편안자세로 서있습니다.


이러한 공재의 말 그림의 뛰어남은 사실성에 있습니다. 즉 오랫동안 말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는 ,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말의 모습이란 점입니다.  남태응의 앞에 책에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공재는)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해 보기를 몇 년간이나 계속했다. 무릇 말의 모양과 의태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볼 수 있고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후에야 붓을 들어 그렸다. 그렇게 그려본 그림을 참모습과 비교해 보고서 터럭 하나 라도 제대로 안됐으면 즉시 찢어 버렸다. 반듯이 참 모습과 그림이 서로 어울린 다음에야 붓을 놓았다 ” 

 

공재가 사실성과 리얼리티를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잘 설명해주는 글입니다. 바로 <자화상>에서의 정밀한 묘사도 이러한 철저한 사실주의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 했을 것입니다.


좀더 그림을 이해하려면 공재가 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공재는 말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말을 인간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되고 대등한 개체로 인정한 듯 합니다. 

 공재의 아들인 윤덕희의 <공재공 행장>을 보면  “공재공은 일찍부터 말을 좋아해 항상 준마를 길렀다. 그러나 공은 자제들이 교외나 먼 곳에 가더라도 거의 말을 타지 못하게 하고 걸어 다니게 했다. 공이 그렇게 한 것은 함부로 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

 

대개 어떤 화가던 자신이 사랑하고 마음에 두고 있는 모습을 그리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윤두서가 자료에서도 확인했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말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화면 왼쪽에 윗쪽부터 3개의 인장이 찍혀있는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효언' '동해상인' '공재' 이렇게 붉은 인주로 찍었습니다.

공재는 보통 자신의 그림에 인장을 한, 두개만 찍었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인장은 '공재恭齋' 이고 다음은 효언孝彦 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개의 인장이 찍힌 경우는 백마도가 유일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공재가 이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음을 암시하며 마음먹고 그린 그림이란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선비의 신분으로 말을 사랑한다는 것은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말이란 일반적으로 무(武)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부터 말은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실을 수 있는 생산과 교통수단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주역에서 말의 위치는 막중했습니다. 팔괘중에 으뜸으로 자연계에서는 하늘을 상징하고, 인간으로 보면 아버지, 신체 가운데에서는 머리에 해당합니다. 성질은 충직하고 굳셉니다.  따라서 말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고도 크게 인간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직성과 희생정신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윤두서는 이러한 말의 충직성과 희생정신의 자세를 기품 있게 그려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말 중에서도 백마를 선택한 점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말을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보통은 밤색과 갈색이 주류를 이루는데 백마는 상징성이 강한 말입니다.  예부터 백마는 신에게 희생을 바칠 때나 신랑이 결혼을 할 때 , 유명한 장수가 큰 전투를 지휘할 때 백마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백마는 의미 있는 날, 신령스럽고 상서러운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말은 안장이나 재갈 등이 없이 자유롭습니다. 말을 타거나 부리는 사람들도 일체 없습니다.  고삐가 나뭇가지에 매여 있으나 백마는 개의치 않습니다. 백마는 일반적인 말이 가지고 있는 사나운 이미지가 전혀 없습니다.  볼기나 얼굴을 보면 젊은 말이 아니고 꽤 나이가 많은 말입니다. 그래서 인지 눈매는 유순하고 인자하며 점잖으며 당당합니다.

 

윤두서 자신은 비록 한 세상 살면서 언제나 세상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습니다.

특히 예술적 분야에서의 공재 윤두서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한 성과를 남기었습니다. 후대에 수묵으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도 우리나라 그림공부는 윤두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당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천연두에 대해 <두신론>이란 저서를 통해 치료법을 저술했고, 지도를 편찬했으며, 칠현금이란 악기와 소노라는 무기를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친인이 죽어버리는 개인적 비극 속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받아야할 빚 문서는 스스로 불에 태워버렸고 노비를 부를 때도 꼭 이름을 불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에 단 한번도 원망하거나 누굴 나무랐던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당색과 무관하였으며 언제나 인자하고 위엄 있고 중후한 모습 이였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공재는 말이 지니는 굳셈, 충직, 희생과 더불어 구체화된 백마의 상서로움, 단정함, 당당함과 의연한 풍모를 지닌 말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투영 시킨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선비. 자기의 모습 이였으면 하는 모습을 그림을 통해 그린 것입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만의 길을 갈 것이고 그 길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굳세게 서있겠다는 공재 윤두서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지요. 

 

살랑대는 바람 속에서 기품 있게 서있는 하얀 말 한 마리.  시대를 개척해온 어느 선구적 중년 선비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현재 보는 이의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2005 . 11 . 27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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