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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이 초라한 이유를 확인하라

신오덕 2015. 8. 19. 15:02
[매경포럼] 리어왕, 돈 콜레오네, 신격호
기사입력 2015.08.17 17:52:31 | 최종수정 2015.08.17 21: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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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롯데그룹은 신동빈 당시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했다. 롯데에 입사한 지 21년, 부회장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당시 신격호 회장 나이는 아흔. 그때 롯데그룹을 담당했던 나는 "이제 차남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룹 측은 "신격호 회장은 이전처럼 경영 현안을 직접 챙길 것이다. 총괄회장이다. 절대 명예회장이라고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롯데 신동빈호`는 그렇게 닻을 올렸지만 실권을 움켜쥔 상왕(上王)과 함께였다.

구순 회장님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롯데 측은"수치에 대한 기억력이 대단하다" "백화점 매장에 나오시는데 신출귀몰할 정도로 정정하다"는 대외용 멘트로 `고령 경영 리스크` 잠재우기에 바빴다. 신문에 나오는 사진도 10여 년 전 버전에서 멈춘 지 오래였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정열의 셔틀경영`도 나이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격호 회장은 2013년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롯데호텔 34층에만 머물렀다. 급기야 두 아들 손을 번갈아 들어주며 신동빈 회장을 승진시킨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롯데의 경영권 분쟁이 터진 후 TV에 비친 신격호 회장의 모습을 보며 머릿속에 두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속 인물 `리어왕`과 영화 `대부`의 마피아 두목 `돈 콜레오네`였다.

이들 모두 세상을 호령한 거인이었지만 말년은 초라했다. 리어왕은 여든 무렵에 후계를 결정짓겠다고 결심하고 세 딸에게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큰딸과 둘째딸은 거짓으로 사랑을 표현해 왕국을 분할받지만 막내딸 코델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가 추방당한다. 하지만 권력을 물려받은 두 딸은 결국 아버지를 내치고 리어왕은 폭풍우 몰아치는 황야에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는다.

대부 돈 콜레오네는 라이벌의 공격으로 크게 다치게 되자 조직을 장남에게 맡긴다. 하지만 그는 부주의하게 행동하다가 암살당하고 조직은 붕괴 위기에 직면한다. 결국 거친 세계와 거리가 멀었던 엘리트 막내가 맡은 후에야 권력을 되찾게 된다.

리어왕의 패착은 후계자의 기준을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 둔 것이고, 돈 콜레오네의 실수는 막내가 제도권 권력자가 되기를 바란 탓에 후계자로서의 그의 자질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신격호 회장은 후계구도를 확정짓지 않고 질질 끈 게 화근이었다. 일본롯데는 큰아들이, 한국롯데는 작은 아들이 맡는 것으로 굳어지는 듯했지만 이번에 드러난 지배구조에서 보듯 후계자 낙점이 안 된 상태였다.

인간에게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맨주먹으로 창업하고 65년간 경영을 장악한 신화적 인물의 자발적 퇴장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멀리하고 내실을 추구한다)`을 경영철학으로 삼으며 총수 모임에도 언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은둔·폐쇄 경영은 소통의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한 것이다. 고령에 접어든 창업자가 권력을 오래 잡으면 오히려 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창업자의 딜레마`가 롯데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창업자의 딜레마`를 쓴 놈 와서먼은 "창업자는 가진 자원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부와 권력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업은 정체되거나 쇠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신도 `승계의 위험(Perils of Succession)` 이라고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롯데의 진흙탕 싸움은 고령화되는 아시아 재계 거물들이 초래하는 리스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라며 "총수 일가가 지배하는 기업에 도사린 위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도했다.

어제 개최된 일본 롯데홀딩스 주총은 신동빈 회장의 승리로 끝났지만 재벌 형제간 다툼은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혈족에 얽매이기보다 능력과 혜안, 포용력 등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해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혈족에서 고르더라도 스웨덴 발렌베리처럼 충분한 시간을 두고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왕자의 난`은 계속 벌어지고, 우리는 또 다른 리어왕, 돈 콜레오네, 신격호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심윤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