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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것을 찾아라

신오덕 2013. 1. 31. 13:59

40년 후의 초상화

  • 13.01.31 09: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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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는 유명한 놀이터가 하나 있습니다. 놀이터 이름은 몰라도 위치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익히 알고 있어서 오래 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한쪽에서 누군가 자유롭게 노래나 기타 연주를 하면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솜씨를 부려 만든 각종 액세서리를 좌판에 늘어놓고 팝니다. 부담 없이 구경하기도 좋고 분위기도 자유로웠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고 사고파는 물건의 품목도 다양해진 것 같았는데, 특히 각자의 독특한 방식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섬세한 선으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꼼꼼하게 그려주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굵은 펜으로 쓱쓱 거칠게 그려주기도 합니다. 또 다른 화가는 멀뚱한 표정을 지어야만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귀엽게 써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길거리 초상화를 그려본 적 없는 제 눈을 확 잡아끄는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그냥 초상화’라는 글귀 밑에 ‘노년 초상화’라고 구분해서 적어 놓았는데, 40년 후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겁니다. 호기심이 일어 자그마한 의자에 걸터앉았습니다. ‘노년 초상화’를 원한다고 하니 새파란 청년 화가가  여러 차례 묻습니다. 정말 괜찮겠냐고.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초상화가가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물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20대에게 40년 후인 60대는 호기심이 생길만도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이미 충분히 나이 든 50대 중반의 40년 후는 90대 중반이 되는 거니까 괜찮겠냐고 물어볼 만도 했습니다.

     

    슬슬 허리가 아파오고 진력이 나려고 할 때쯤 완성이 된 모양입니다. 색연필로 색칠까지 해서 제 손에 들려준 엽서 한 장 크기의 그림, ‘40년 후의 유  경 씨께’라고 쓰고 직접 서명까지 한 초상화. 한 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얼굴도 퉁퉁하게 살이 올랐지만 그림 속의 저는 두툼한 턱 선이며 입가의 팔자주름까지, 착하고 곱게 늙은 할머니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실망했지요. 


    그러나 버리지 않고 집에 들고 와서 가만 들여다봅니다. 착한 얼굴로 곱게 늙고 싶다는 소망과 달리 욕심쟁이 할머니 같아서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책꽂이 한 쪽에 붙여 놓습니다. 맘에 안 든다고 제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그 청년 화가의 눈에 이렇게 비친 건 사실이니까요. 매일 들여다보며 이렇게 늙지 않겠다고, 이런 얼굴로 늙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착하고 곱게 늙으려고 노력하면 될 일이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림을 자꾸 보니 정이 든다는 겁니다. 앗, 그렇다면 정말 40년 후의 제 얼굴이 맞는 것 아닐까요?